인조는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가 지키려던 왕조는 무너졌지만, 남한산성은 지금 거기 그 자리에 굳건하게 있고, 나랏일은 조정에서 알아서 할 것이라고 믿고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서날쇠들’의 삶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치욕과 자존, 실리와 대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여전한 거냐고, 도성의 어질어질한 초고층 빌딩이 멀리 내다보이는 남한산성으로 그를 불러 ‘싸가지 없는’ 후손은 감히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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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문장을 생각하며,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군량미도 없고, 더 이상 싸울 여력도 없고, 계책도 없는 싸움이라니!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쓰윽 훔쳤다. 마침 바람이 불었던가. 솨아솨아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부딪치는 소리들이 예의 문장 때문에 어수선해진 나의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래, 잘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을 탓하는 유구한 악습을 버려야 이현재의 순간과 앞날을 충만하고 책임 있게 살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자 발걸음이 좀 가벼워졌다. 마음을 고쳐먹자 산성입구의 모텔, 노래방, 음식점의 간판들이 그렇게 잔망해 보일 수가 없었다.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 선생과 만나기로 약속한 유명한 닭백숙 집이 눈앞에 보인다.
나는 임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들어 의리와 명분을 중시했던 인조 반정파反正派들의 정치적 무능력과 파당 싸움이 결국 수많은 백성의 목숨과 재산을 앗아가게 했다는 ‘혐의’를 여전히 갖고 있다. 옛 청나라 수도 심양에 끌려간 조선인 인질이 두 왕자를 비롯해 60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라. 그래서 나는 효종 시절의 와신상담이니, 북벌론北伐論이니, 복수설치復讐雪恥(복수하여 치욕을 씻는다)니 하는 말과 정책 또한 과장된 수사학과 정치적 제스처의 산물이라고 보는 편이다.
아, 이러면 조상 탓이 되려나․ 그런데 효종 임금으로부터 대로大老라는 극존칭을 하사받았던 청음 선생은 의외로 ‘까칠한 후손’의 변덕스럽고 편벽한 마음을 잘 헤아려주었다. 그의 어조는 솔직하고 차분했다. 나 또한 선생과 말을 섞으면서 그 시대와 고뇌 그리고 앞날의 남한산성 복원에 관한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아래의 내용은 1박 2일 동안 청음 선생과 통음하며 나눴던 이야기 가운데 지면 사정상 천분의 일쯤 되는 내용을 췌록해 옮긴 것이다.
명분은 그렇게 하찮게 여길 것이 아니네
나- 김훈의 <남한산성>을 어떻게 보셨나․ 척화斥和와 주화主和를 각각 주장한 선생과 최명길 선생의 대립과 갈등의 내면 풍경을 잘 그려냈다고 보시는가․
선생- 언문소설이라 읽기가 퍽 힘들었다네. 하지만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4쪽) 같은 문장들을 만날 때면 책장을 덮고 옛터를 홀로 거닐곤 했다네. 술잔깨나 좋이 기울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지.
나- 선생의 시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임진년 왜란과 정묘・병자년 호란 같은 난리통을 다 겪지 않았나. 예조판서로 겪은 병자호란은 내치內治와 외교外交 차원에서 동시에 전쟁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았나․ 임금은 물론 장졸들이 말고기를 먹는 장면을 보며 참담했다.
선생- 후~ 못난 조상이 돼서 무슨 변명이 필요할꼬․ 정묘년 호란 후 ‘눈 떠라 눈 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황동규)는 걸 나도 모르지는 않았다네. 허나, 그 무렵에 주자학의 가르침이 명분과 의리를 중시했다는 걸 누가 부정할진저. 그래서 자네 말이 참 아프고, 생각할수록 치욕스러운 것은 어찌할 수 없다네. 결과적으로 “너희가 벼루로 성을 쌓고 붓으로 창을 삼아 내 군마를 막으려 하느냐”(28쪽) 하는 오랑캐 칸干의 말에 제대로 항변 한번 못했으니……. 허
나- 대의명분이 없었더라면 국파國破가 된 조선은 재기불능이었을 것이라네. 그런 심정으로 임금 앞에 엎드려 6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목숨을 내놓고 간언을 했다는 충정만은 잊지 않기를 바라네.나 이 질문만 하고, 만질수록 상처를 덧나게 하는 질문은 안 드리겠다.
선생과 최명길 선생 같은 식자들이야 그렇다 치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장장이 ‘서날쇠’ 같은 백성들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나․
선생- 음, 저들은 욕欲에 충실했다고 봐야겠지. 기본 생존에 필요한 필수적이고 당연한 욕구가 아니겠나․ 그러나 사대부를 자처한 우리 선비들은 더 많은 권세와 재물을 차지하기 위한 욕慾에 빠졌다고 자인할밖에! 유구무언일세. ‘서날쇠’와 같은 백성이 있었기에 후손이 지금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 호란 후 3년 뒤(1640), 칠십 노구의 몸으로 심양에 끌려가면서 남긴 시조가 생각난다. 훗날 100년 후 사람들이 선생의 절의를 알아줄 것이 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은 어떠하신가․
선생-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노라” 그랬지. 삼각산이고 한강수고 내 생전에 다시 고국 땅을 밟을 날이 있을까 하는 절박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네. 5년 만에 돌아와 효종 임금을 보필해 국책사업으로 북벌정책을 폈는데, 청淸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내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다네. 당장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한 전쟁통에 ‘싸워야 한다,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내 생각이 없었더라면 100년 뒤 영・정조 임금 때의 번영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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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잊는다면 역사에서 무얼 배우겠나
나- 화제를 돌려 산성에 관한 질문을 드리겠다. 인조 4년(1626)에 완공된 남한산성은 약 400년간 치욕의 역사와 더불어 백성들의 곡절 많은 애환을 간직한 장소라는 일부의 시각도 있다. 1894년 산성 승번 제도(산성 주변의 승려들로 승군을 조직해서 관군과 함께 산성을 방어하도록 한 제도)가 폐지되고, 1907년에는 일본군에 의해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선생- 장소의 고유성과 역사성을 지키자는 자네의 주장에 나도 동감하네. 비록 부끄러운 ‘기억의 역사’일지언정 그것을 제대로 배우는 장소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겠지. 박제된 전시가 아니라 역사 인물과 옛 장소에서 대화를 나누고, 스스로 기념과 추모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나 역시 바라마지 않네.
나- 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고 한 김수영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은 해방 후에도 남한산성은 교도소(1985년 경기도 장호원으로 이전)와 먹고 마시며 노는 유원지의 이미지가 강했다.
시인 고은 같은 분이 1980년 남한산성 육군 형무소에서 <만인보>를 처음 구상한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 군사정부 때 나 역시 남한산성 문무대에 입소해 일주일간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 역사의 간지奸智랄까, 역사의 복수를 보는 것 같아 좀 비감 해지네. 못난 조상이지만, 내 이 말만은 꼭 자네에게 하고 싶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도 맞지만, ‘길이 있으니 뜻이 생기더라’는 말에 담긴 지혜 또한 잘 헤아려주었으면 하네. 역사를 거창한 어떤 것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일상이 곧 역사’라는 생각을 갖고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겠지.
공자님께서는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라고 말씀하셨고, 가까운 곳부터 공부하라는 말이 <근사록近思錄>이라는 책의 제목에도 담겨 있다는 점을 생각해주었으면 한다네. 지혜로운 자는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 아니겠는가.
나- 좀 무거운 말들이 오간 것 같다. 말씀대로 일상이 역사가 되는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선생이 생각하는 ‘영업 비밀’이 있다면 알려달라.
선생- 하하하. 한낱 장사치에 비유하다니! 내 생각으론 산성의 면면한 역사와 함께 이어져 내려온 백성들의 삶 자체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나 싶네. 산성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백성들과 더불어 호흡하는 역사문화의 마당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네. 옛 한성에 있는 유적을 보노라면 고립된 섬을 보는 것 같아 애석한 마음 금할 길 없네. 숙고하고 또 숙고해서 여기에 사는 사람들과 지혜를 모은다면, 다양성이 살아 있는 공간이 되지 않을까 싶네. 옛 권력의 힘과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진 남한산성에 문화가치를 생생히 불어넣는 일은 자네와 같은 후손들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지 논하는 과정에서 절로 나오리라고 믿네. 나는 자네들을 믿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서날쇠들의 삶 청음 선생과의 대화는 그렇게 1박 2일간 계속되었다. 선생은 후손의 일에 개입하는 일은 주제넘은 행위라며 한사코 말을 아꼈다. 그러나 역사에 관한 관점과 사고가 변하고, 행위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해졌다. 역사에 대한 자존감을 갖는다면, 부끄러운 역사인들 더 이상 무엇이 부끄러울 것이란 말인가. 그곳에서 만나는 이들이 김훈 소설 속의 대장장이 ‘서날쇠들’이 아니던가. 역사에 관한 강박관념이 없이 사고하고, 대화하고, 대안을 찾으면서 일상의 역사와 문화를 쓰고 만드는 일은 결국 우리의 몫이 아닐까.
글 고영직_문학평론가 | 사진 나석민
출처 문화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