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을 때 뺨을 때려 마음껏 울게 하고, 기쁠 때 마음의 볼륨을 높여 더 행복하게 하고, 슬플 때 더 깊은 슬픔으로 밀어 넣어 한껏 슬프게 만드는 것. 노래가 하는 일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대로라면 “노래하는 놈”인 장사익. 그렇게 누군가를 울리고 웃기고 치유하니, 진짜 행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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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정 최근 근황부터 여쭙겠습니다. 얼마 전에 환갑잔치를 겸해서 뉴욕 공연을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요, 공연은 어떠셨는지요?
장사익 그건 그냥 하는 얘기고. 금년이 환갑인데, 환갑잔치를 하면 돈을 많이 쓰잖아요. 그래서 돈 손해난 것을 환갑잔치 한 셈 치는 거지. 한 5억 원 손해났어요. 2년 전에 미국 공연 갔을 때, 한 2억 원 손해났는데, 환율이 올라서 배로 손해났어요.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환갑잔치로 돈 쓰고 멋지게 놀고 왔다고 한 거지.
장유정 이번 공연은 뉴욕만 다녀오신 건가요?
장사익 뉴욕에서 본 공연을 하고 뉴욕 옆에 코네티컷 주 예일대학에서 공연을 했어요. 예일대학에서 한 건 공식 공연이 아니고 일종의 문화 나눔이라고 할 수 있지. 우리 동포라든가 그 주변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대중음악을 들려주는 거였어요. 그리고 오는 길에 하와이에 있는 무량사라는 절에서 일종의 산사 음악회를 열었지. 외국 사람들이 특히 많이 왔어.
‘하늘 가는 길’에서 희망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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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정 이번 뉴욕 공연 제목이 인상적이네요. <Voyage to Heaven>이면 ‘천국으로 가는 여행’ 정도가 되나요?
장사익 그치. ‘하늘 가는 길’ 일종의 레퀴엠requiem이야. 내가 죽음에 대한 노래를 많이 했어요.
장유정 선생님 말처럼 선생님 노래 중에 죽음을 주제로 한 노래가 많은데요, 이번 공연의 주제를 ‘죽음’으로 잡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장사익 얼마 전까지 연예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런 생각을 했어. 삶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밤과 낮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거든. 하늘과 땅이 떨어져 있지 않고 붙어 있듯이 삶과 죽음도 하나야.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거든.
그런데 깜깜한 밤에 불빛이 하나 있으면 그게 바로 희망이고 소망이야. 마찬가지야. 추운 겨울날에도 따뜻한 햇살이 있으면 그것이 희망이잖아.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깜깜한 죽음의 세상을 알면 광명천지의 삶이 지닌 소중함을 알 수 있잖아.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삶을 얘기하려고 한 거지.
장유정 결국, 죽음의 노래를 통해 삶의 소중함을 얘기하신 거네요.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장사익 선생도 잘 알겠지만, 레퀴엠이라는 것이 특별한 날에만 부르잖아. 우리의 만가도 마찬가지고. 그 어느 누구도 신경을 안 쓰는 노래인 장송곡, 만가를 가지고 콘서트를 연다는 것이 우스운 거야. 그래도 주제가 있는 노래를 해야 의미가 있지, 히트곡이나 흥겨운 노래만 부르면 의미가 없잖아.
장유정 해외 공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공연을 위해 가보신 곳 중에서 호응이 가장 좋았거나 인상 깊었던 곳은 어디였나요?
장사익 2년 전 한 달 동안 미국 공연을 다녔어요. 첫 번째 공연을 뉴욕에서 했는데, 내가 무슨 독립투사나 된 것처럼 무대에 올라서니 울컥하더라고. 그 공연이 감동적이었어요.
그리고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에 국립국악관현악단, 황병기 선생님이랑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었어요. 그곳이 참 아름다워요. 사람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공연한 곳이 100년, 200년 돼서 삐걱거리는 오래된 극장인데, 러시아 사람도 오고 고려인도 오고 많이들 왔어요. 그들이 공연을 보면서 발을 동동거리는데, 그렇게 그들이 문화를 즐기고 향유하는 것을 보면서 이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아닐까 했어요.
장유정 특히 기억에 남는 팬도 있으시죠?
장사익 그럼요. 많은 사람이 기억에 남는데, 한 7~8년 전인가 일본 나고야에 살던 대학교수 팬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이나가키’라는 교수가 암에 걸려서 오늘내일 하는데, 그 교수 소원이 죽기 전에 내 공연을 보는 거였어. 그래서 이나가키의 친구들이 소원을 들어주려고 나를 초청했지. 2월 25일로 기억하는데, 공연 전날 집에 갔더니 그 교수가 비쩍 말라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 있더라고.
교수 친구들이 ‘네가 이러고 있으면 되냐? 어서 일어나라’고 했지. 다음 날 공연 리허설을 했는데, 리허설이 다 끝나고 오후 4시 30분쯤 되어서 그 교수가 아내와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온 거예요. 그 교수가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아서 그 교수만을 위한 한 시간짜리 공연을 했어요.
그런데 그 교수가 안 돌아가는 거야. 7시 공연을 보고 그곳에서 뒤풀이도 하고 10시까지 있었어. 내가 그랬지. “오늘은 이나가키의 날이다. 이날을 영원히 기억하고 그가 가는 길을 지켜주자.”
그 교수가 나가는 길에 우리 모두가 박수를 쳐주었어요. 나는 공연 다음 날 돌아왔는데, 그 해 3월에 이나가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어. 내가 공연 때 주었던 사인이 있는 포스터와 음반을 이나가키의 관에 함께 묻어주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1년 있다가 이나가키의 부인이 인사동으로 나를 찾아왔는데 딸랑거리는 아주 작은 주머니를 꺼내서 “여보, 장사익 선생님 보러 왔어” 하더라고. 유골을 넣은 주머니인 거지. 나도 나중에 죽으면 내가 갔던 곳, 놀던 곳이랑 집, 고향, 인사동, 극장을 그렇게라도 한 번 더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산전수전 겪고 노래에 입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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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정 얘기를 조금 바꿔서요, 선생님 어렸을 때 얘기 좀 들려주세요. 어떤 학생이었나요?
장사익 나는 어렸을 때 참 고지식했어요. 있는 듯 없는 듯한 학생이었지. 일례로, 내가 서울로 올라갈 때 아버지께서 서른 살 안쪽까지 술, 담배,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래야 하는 줄 알았어. 내성적이고 시키는 대로만 하고, 그야말로 FM이었지.
장유정 그러다가 태평소부터 부신 거잖아요.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장사익 얘기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거든. 우리 아버지가 옛날부터 농악을 하셨어요. 전문가는 아니셨지만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장구라든가 여러 장단 소리에 익숙했어. 그때 태평소 부는 아저씨가 저녁이면 늘 둑에서 태평소를 불었는데, 나만 항상 거기에 가 있었어.
장유정 그때부터 그 소리가 좋았던 거군요.
장사익 그렇죠. 그러다 보니, 그 소리가 항상 몸에 배어 있었지. 장구라든가 가락, 장단 같은 것,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웅변을 했거든. 산에 올라가서 소리를 지르곤 했지.
장유정 그때 목이 트였겠네요.
장사익 그랬겠지. 그래도 그때까지 노래는 전혀 안 했어. 노래하라고 하면 책을 읽다시피 했어. 근데 목청이 좋다 보니까 선린상고에 들어가서 소풍 때 노래를 불렀는데 그냥 되는 거예요. 만날 주위에서 노래를 잘한다고 그러니까 그럼 노래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취직하자마자 낙원동에 있는 가요학원에 다녔어요.
1967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3년 동안 가요학원에서 음악을 제대로 배웠어. 코드도 배우고 발성도 배우고 노래 하나 가지고 일주일 동안 연습하고 그랬어. <가슴 아프게> 하나로 일주일 동안 연습을 해서 토요일에 릴 테이프로 만들어 들어보곤 했어. 그때 우리나라 가요는 거의 다 섭렵했지.
군대에서도 시험 봐서 문선대에서 노래를 했지. 그런데 제대하고 보니 군대 전에 다녔던 보험회사가 딴 데로 넘어가서 복직을 못했어. 그때부터 엇갈린 거라. 그래서 무역회사에 다녔는데 1973년도에 일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서 무역회사에서 잘리고 그 뒤로 한 15군데 직장을 전전했어. 힘들고 어려울 땐데 태평소 생각이 났어.
그래서 80년도에 국악에 입문했지. 태평소도 배우고 대금도 배우고. 국악을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사회생활도 병행했어요.
장유정 그럼, 태평소를 하시다가 노래는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장사익 92년도에 매제가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일을 했어. 밥이라도 먹겠다고. 그런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 열심히 살긴 했는데 죽을힘을 다해서 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살아보자는 생각에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제일 마지막에 남는 것이 태평소였어. 그때부터 여기에 목숨을 걸자 생각하고 태평소를 불었어. 아주 정말 열심히 살았어. 그러는 와중에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정말 잘한다고 뒤집어졌어. 그러다가 임동창이를 만나서 ‘형, 나가!’라고 해서 노래를 하게 되었지.
그때가 94년도 11월이야. 그때는 한 번만 할 줄 알았지. 그런데 운이 좋아서 계속하게 된 거야.
장유정 선생님께서 그동안 노력해온 것이 빛을 발한 거죠.
장사익 노력보다는 운명적으로 그렇게 되었지. 하나하나 쌓여서 노래라는 집을 만들게 된 거야. 의도적으로 했다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 같아. 인생을 살다가 깨지고 얻어터지고 그 아픔을 삭이면서 국악도 하고 좋은 사람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하게 되었지.
장유정 선생님께서는 마흔다섯 살에 데뷔하셨잖아요. 목소리도 늙는다고 하고 얼마 전에는 목에 통증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평소에 목소리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장사익 이번에는 감기가 한 달 이상 갔어요. 끝나가기는 하는데 아직도 안 좋아. 그래도 나는 술, 담배를 안 하니까. 그냥 즐겁게 살고 그러는 거지.
장유정 그런 것 같아요. 젊었을 때는 젊은 만큼 나름의 열정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또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어요. 그리고 그 맛은 세월이 만들어주는 것이라서 젊은이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아요.
장사익 노래라는 것이 뭐냐하면 가슴 속의 희로애락을 제대로 뽑아내는 것이거든. 사십대는 사십대에 맞는 노래, 육십대는 육십대에, 칠십대는 칠십대에 맞는 노래가 있어요. 이게 얼마나 재미있어.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노래 자체다
장유정 루이 암스트롱이 그런 말을 했대요.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음악 자체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하는데요, 선생님도 재즈와 국악, 가요 등의 장르를 넘나드시는 것처럼 보여요. 선생님께 장르는 어떤 의미인가요?
장사익 악보는 노래를 오래 기억하려고 만들었어요. 옛날 우리 민요에 악보가 있었나? 그냥 들으면서 불렀지. 마찬가지로 노래도 자꾸 정해놓으려고 할 필요가 없어. 가요고 재즈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어떤 사람은 ‘저 노래가 알앤비인데, 알은 없고 비만 있다’고 말해. 그런 말을 들으면 ‘저 사람이 먹고살라고 저러는구나’ 싶기도 해. 공감하고 소통하면 되는 것이지, 그걸 따지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 그냥 ‘Let it be.’ 내비둬요.
장유정 선생님께서는 트로트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사익 마늘과 고추도 원래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래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 것이 된 거지. 트로트도 마찬가지야. 고속도로에 가봐. 거기 가면 대부분 트로트야. 왜 그러겠어. 그 노래를 찾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거거든. 그냥 다양한 것을 인정하면 되는 거야.
장유정 다양한 것을 인정하면 되는데요, 다르면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가진 자라든가, 배운 자들은 본인들이 향유하지 않거나 본인들이 생각해서 천박한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장사익 그게 아직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해서 그런 거야. 일등이 있으면 꼴등이 있고 꼴등이 있으면 일등이 있는 것이 세상 이치야. 다양하게 있으니까 세상이 잘 돌아가는 거야. 세상에 트로트만 있어봐. 그러면 안 되거든. 세상에 클래식만 있어도 그것도 안 되는 거야. 트로트를 옛날에 왜색이라고 했지만 트로트를 부르면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줘.
장유정 트로트를 들으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마음의 문을 여는 걸까요?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요?
장사익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환을 지니고 있잖아. 요즘에도 열에 아홉은 힘들거든. 이러한 사람들을 다독거려줄 수 있는 음악이 뭘까. 같이 울어주는 것이 위로거든. 내가 <동백아가씨>를 부르면 사람들이 같이 울어. 비 온 뒤에 하늘이 갠 것처럼 슬픔에 푹 빠졌다가 나오면 개운해지는 거지. 일종의 카타르시스야.
장유정 선생님을 ‘노래를 부르는, 노래를 통한 마음의 치료사’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장사익 건방진 얘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들으면 ‘행복’이라는 단어를 써요. ‘아, 행복해요’라고 말하거든. 어떤 사람이 그러는 거야. 사인을 해주고 있는데 나한테 오더니 그러더라고. “장선생! 나, 사인 필요 없어. 내가 오늘 아침까지 정신병원 약을 먹었거든. 그런데 오늘 당신 노래 듣고 정신병원 약 끊을 거야. 40년 동안의 고통이 당신 노래를 듣고 싹 없어졌어.” 바로 그거거든.
장유정 소통하고 공감하고 치유하고. 그것이 선생님 노래의 힘이네요. 그런데, 선생님, 혹시 노래방에 가세요? 선생님 애창곡은 무엇인가요?
장사익 노래방에는 안 가. 그냥 여기서 부르지. 내가 만든 노래는 다 좋은데, <동백아가씨>와 <봄날은 간다>를 제일 좋아해. 그 노래에는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어. 공연 때는 그 노래들을 꼭 불러.
가슴 뛰는 일에 일생을 바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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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정 음악을 한마디로 말씀해주신다면 뭐라고 하고 싶으세요?
장사익 음악은 삶이다. 음악에 삶이 다 있거든. 희로애락,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있어.
장유정 저희 대담도 거의 막바지로 가고 있습니다. 항간에서는 선생님을 대안 가수, 한국 토속 재즈 싱어, 소리꾼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요, 선생님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장사익 그냥 ‘노래하는 놈’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여담인데, 제가 1994년도에 처음으로 소극장에서 공연할 때, 변辯을 하나 썼어요.
‘때 묻은 몸, 발가벗는다. 당치도 않는 말이다. 허나 원 없이 소리칠란다. 나처럼 행복한 놈者 없다’라고. 그런데 그것이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온 거야.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친구들이 등 떠밀어서 나왔는데, 이렇게 노래를 하고 있잖아. 내가 옛날에 꿨던 꿈을 이렇게 펼치고 있는 거야.
장유정 선생님은 노래할 때 가장 행복하시죠? 행복하고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해야겠죠?
장사익 아, 그럼요. 내가 그때(두 사람은 2007년 7월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한 학술대회와 공연이 어우러진 ‘학술판굿’에서 만난 적이있다.)도 말했잖아. 밥 먹고 아기 키우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잖아. 그런데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한번 하고 가는 거여. 그게 잘되면 좋겠지만, 안 돼도 해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 거여?
내가 11월에 마라톤 완주를 하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나를 말려. 잘못하면 큰일 날 수 있고 한 달 이상 고생할지 모른다고. 그런데 하고 싶어서 미치겠어. 지금 그 꿈에 부풀어 있어. 42.195km가 우리에게는 극한의 길이잖아. 그래도 그 길을 가고 싶어.
※장유정-단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200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가요 연구-유성기 음반 자료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중가요, 대중문화와 관련한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오빠는 풍각쟁이야-대중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과 <다방과 카페, 모던보이의 아지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