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경기도의 수부도시 수원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대왕이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를 향한 효심과 웅대한 개혁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세운 계획 신도시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축조된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수원은 경기도청이 들어선 경기도 중심 도시이자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외 대기업의 생산-연구시설이 있는 경제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열린 연등축제에서 봉축 연등행렬이 팔달문을 지나고 있다 ⓒ 각 시군
정조대왕이 세운 계획도시
수원 시내 도심 한복판에 우뚝 솟은 팔달산을 중심으로 5.7㎞에 걸쳐 펼쳐져 있는 화성은 사적 제3호로 길이 5.743㎞에 면적은 1,3㎢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다. 화성은 총 51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시설물은 45개로 6개 시설물이 미복원 상태이다. 화성은 성문, 누대 등 건축 양식이 동양성곽의 웅대함과 서양성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또 당시 화기에 대한 공격과 방어에 대처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는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과학적인 설계로 축성된 성곽이다.
서장대는 경기도청 옆 팔달산에 위치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지휘본부로서,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벌어지는 전투나 군사훈련을 총지휘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이며 관광객들을 위해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서장대에서 북쪽으로 성곽을 따라 걷다가 보물 제403호 화서문과 보물 제1710호 서북공심돈을 만날 수 있다. 서장대는 아래로는 화성 행궁과 멀리 장안문, 팔달문도 한눈에 들어와 날씨가 좋은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서장대에 올라 풍경을 감상한다.
화서문에서 성곽을 따라 이어진 장안공원을 지나면 화성의 북문 장안문을 만난다. 장안문은 문루의 높이가 13.1m, 11.4m로 성 중앙에 문을 내 남문인 팔달문과 마주보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문루가 파괴된 것을 1976년 복원했다.
5분 거리에는 북쪽 수문인 화홍문이 인접해 있다. 화홍문은 누각 형식의 수문이다. 화홍문과 북암문 사이에 위치한 보물 제1709호 방화수류정은 성의 동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요지로 성 밖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비상시 지휘소가 되는 시설이다.
거북바위 위에 위치한 방화수류정은 군사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경치가 빼어나다. 방화수류정 가운데 정자가 있고, 아래에는 용연이라 부르는 연못이 있다. 방화수류정의 조명과 하늘에 뜬 달이 어우러져 용연에 비치는 모습은 용연제월(龍淵霽月)이라 하여 수원 화성 최고의 야경으로 손꼽힌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과 벽화의 모습. 한국전쟁 때 크게 파손된 창룡문은 1976년 복원됐다 ⓒ 각 시군
성곽 전체가 하나의 예술작품
화홍문을 지나면 당시 군사들이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너른 광장인 연무대가 나타난다. 정조대왕이 이곳에서 직접 활을 쏘기도 했으며, 현재는 관광객들이 국궁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국궁 체험장 뿐만 아니라 ‘화성열차’가 운행되어 어린 아이들이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도 팔달산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이어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을 만난다. 창룡문은 한국전쟁 때 문루가 소실되고 문의 기틀인 홍예까지 크게 파손되었으나 1976년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동남각루에서 성곽이 끊어지고 재래시장인 지동시장으로 길이 이어진다. 동남각루에서 팔달문 사이는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가 90여 년 만에 복원되었다. 재래시장을 나오면 도로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이 나타난다.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은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2층 누각이며,문루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옹성이 있다.
정조의 효심이 그대로 느껴지는 임시궁궐 ‘화성행궁’
화성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화성행궁’이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사가 머무르며 집무를 보는 장소였고 정조임금께서 현륭원을 찾으실 때는 임금이 머무는 임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1789년 읍치 이전 후 1790년부터 본격적인 관청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1795년 을묘년 원행을 준비하면서 증·개축이 이루어져 576칸이나 되는 조선시대 최대 규모의 행궁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 정책에 의해 신풍초등학교 내에 낙남헌만 남긴 채 모두파괴되기 시작하여 봉수당 자리엔 자혜의원(후 경기도립 수원병원)이, 북군영에는 경찰서 등이 들어서며 행궁의 원래 모습을 잃어갔다. 오직 일제시대 수원군청으로 사용된 낙남헌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이에 수원시민들이 나서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하면서 경기도립 수원병원과 경찰서를 옮기고 주요건물 482칸을 복원해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세계인이 반한 한국의 맛 ‘수원갈비’
수원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원갈비’다. 갈비는 가장 한국적인 음식이면서도 세계인의 입맛을사로잡은 대표 음식이다. 수원갈비는 갈비구이의 원조로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수원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한우에 천연양념을 하고 참숯불로 구워내는 수원갈비는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수원 최초의 갈비 음식점은 1940년 화성 문밖 장터인 지금의 영동시장 싸전거리에 문을 연 ‘미전옥’이다. 미전옥으로 출발한 故 이귀성 씨의 ‘화춘옥’은 수원시민들은 물론 전국의 미식가들에게 갈비구이의 명소로 사랑받았다.
화춘옥은 해장국만 팔다가 1956년 처음으로 양념갈비를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옛 궁중이나 명문대가에서 즐기던 대로 길이 7㎝ 이상의 뼈에 붙은 푸짐한 고기에 고추, 파, 마늘, 후춧가루, 배, 참기름 등 40여 가지 양념을 버무려 소금으로 간을 하고 참나무 숯불에 갈비를 구워냈다. 수원갈비는 1950년대초 당시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사흘이 멀다 하고 시흥에서 말을 타고 달려와 포식했다고 해서 유명해졌다. 1979년 화춘옥 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화춘옥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현재 수원에는 100여 개의 갈비집들이 성업 중이다.
수원갈비 ⓒ 각 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