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제274회 희망의 경기포럼에 참석한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강연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 경기G뉴스 유제훈
“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를 버린 아버지를 열다섯에 미국에 입양된 지 35년 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이복동생이 다섯이나 되고 계모도 계셨습니다. 준비한 선물을 모두 버리고 울면서 돌아왔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제 핏줄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길로 아버지와 새어머니, 이복동생 다섯 명을 미국으로 모시고 와 함께 살았습니다.”
20년 후 미국에서 한국인 대통령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신호범(Paul Shin·78)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 미국에서 성공한 고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신 부의장은 15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입양아다. 미국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주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5선을 지냈다.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 그런 그가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도청 직원들 앞에 섰다. 13일 오후 제274회 희망의 경기포럼에 강연자로 나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주제로 인생스토리를 담담히 풀어냈다. 그는 부모를 잃고 굶주림에 힘겨웠던 어린시절 이야기부터 꺼냈다.
“6·25 전쟁통 속 굶주림에 허덕이다 미군부대에 흘러들어 허드렛일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그때 만난 미군장교가 지금의 양아버지. 열다섯 살에 함께 미국에 갔지만 언어가 안 통해 모든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했죠. 별 수 없이 검정고시로 학업을 마친 후 이를 악물고 공부한 끝에 워싱턴주립대 동양역사학 대학원 석·박사를 땄습니다.”
신 부의장은 미국에 온 당시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앞만 보며 공부하던 그를 끝내 정치에 몸담게 한 일이 일어났다. 그당시 동양인이라면 미국에서 흔히 당하던 일이었다.
“백인이 아니면 가게에서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미국인 친구들과 함께 들어갔지만 끝내 저만 문전박대 당했죠. 머릿속엔 ‘왜?’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20대 초반의 일이었다. 동양인이라고 차별대우 받는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그는 언젠가는 미국정치에 뛰어들어 이런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워싱턴 주지사와 인연이 돼 1993년 하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선거운동이 막막했다. 1만4천여 집을 일일이 문들 두드려 주민들과 눈을 맞췄다. 처음엔 경계하던 미국인들은 ‘미국인에 봉사하겠다고 나선 한국에서 온 입양인’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주 상원의원에 당선돼 4선을 내리 지냈다. “한국인을 대표하는 정치인이고 싶었습니다. 안된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어디든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되고 맙니다.”
그는 현재 한미 정치교육장학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젊고 패기 넘치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미국땅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내가 도움 받았듯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 넓은 미국땅에서 종횡무진하는 한인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부의장이 도청 직원들 앞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 경기G뉴스 유제훈
한편 또 다른 강연자로 초청된 임용근(Jhon Lim·78) 전 오리건주 상원의원 역시 총 5선을 지낸 호평받는 정치인이다. 고향은 여주로 서른 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적색사상을 가졌다며 많은 이들이 학살당한 때가 있었습니다. 여주에서만 500여 명이 죽임을 당했고, 그 중 한 명이 저희 아버지였습니다. 남은 가족들 역시 ‘빨갱이’로 낙인찍혀 살기 어려웠고 고향땅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떠날 당시 그는 목사였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청소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적소성대(積小成大)라는 말을 좋아한다. 작은 것을 쌓아서 크게 이룬다는 말이다. 미국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지만, 열심히 살아 지금은 한인 정치인을 키우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고 했다.
임 전 의원은 세계한인정치인협의회장이다. 존림장학회 이사장이기도 하다. 오리건주 한인회장도 지냈다. 다소 늦은 나이에 미국에 와 언어문제로 의사소통도 잘 안 됐지만 한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었다. 능력이 되는 한 다양한 사회단체활동을 펼쳤다.
이에 더해 2010년에는 한인 최초로 주지사에 출마했다. 보수적인 미국사회에서 당선을 바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전했다.
“밤낮으로 티비에 얼굴을 비추며 나를 알렸습니다. 음식점에 가면 여기저기서 수근대기도 했죠. 결과는 괜찮았습니다. 공화당에서 7명이 출마했는데 2등을 했어요. 당선은 아니지만 한국인으로서는 역사적인 결과였죠.”
‘노력하면 뭐든 된다’는 그의 철학은 미국에 건너와 50여 년을 살며 늘 통했다. 그는 내년에 주지사에 다시 한번 도전할 계획이다.
“초등학교 동창 4분의 3이 죽었어요. 여든 살 노인이 출마한다고 웃음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Challenge(도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위트있는 언변에 쉴 새 없이 웃는 청중들에게 그는 “모든 꿈을 다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꿈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죠”라며 힘차게 외쳤다. “Have a dream!”
임용근 전 오리건주 상원의원이 강연을 하고 있다. ⓒ 경기G뉴스 유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