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는 책, 의자, 햇빛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최근 어느 책에서 스무 살 시절의 꿈을 밝힌 바 있다.
“나는 사람 키보다 더 높게 자란 파초를 키우고, 연못이 있는 집에서 여름마다 나무 그늘 아래 의자를 놓고 책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읽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꿈의 전부였다.”
(장석주, 『일요일의 인문학』, 호미, 2015)
장석주 시인은 2000년 번잡한 서울살이를 접고 안성에 수졸재(守拙齋)를 지었다. ⓒ 경기문화재단
안성 금광 호숫가에 자리 잡은 수졸재와 문화공간 호접몽은 젊은 시절 시인의 꿈이 실현된 곳처럼 보인다. 시인은 2000년 번잡한 서울살이를 접고 이곳에 수졸재(守拙齋)를 지었다. 수졸은 자기 분수에 맞게 산다는 도연명의 시구이자 바둑의 9품계 중 초단을 뜻하는 말이다. 자기를 낮추고 자연과 함께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수졸재에 가득 쌓인 장서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책 탐닉자이자 문장가인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시인은 서가로 이루어진 미로를 거닐며 세상을 읽고 사유의 길을 더듬는다.
“경기도 남단 안성의 ‘수졸재’는 서른 몇 해 동안 모은 장서가 있는 곳이다. 정확하게 몇 권인지 세어보지는 않았으나 스물다섯 평 서재에는 서가들로 꽉 차 있다. 아마도 2만여 권은 넘으리라 짐작된다. 다락과 창고, 서울 집필실의 책들을 다 합하면 3만여 권이 넘을지도 모른다. ‘수졸재’ 서가에는 온갖 책이 꽂혀 있다. 고전과 신간이 뒤섞여 있고 시집, 소설, 철학, 역사뿐만 아니라 자서전, 평전, 민담, 심리학, 인류학, 식물학, 우주과학, 물리학, 뇌 과학, 축구, 요리, 건축, 미술… 등등의 책들이 구분 없이 꽂혀 있다. 내 서재는 ‘잡다한’ 책들의 미로다.”
(『일요일의 인문학』, 2015)
느림의 탐닉, 고독의 권유
시인, 소설가, 에세이스트, 비평가, 출판사 대표, 방송 진행자…. 스무 살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평론이 당선된 이후 시인 장석주에게는 늘 ‘전방위 작가’라는 꼬리표가 따랐다. 수많은 명편집자를 배출한 출판사 고려원에서 편집장을 지냈고 이후 청하출판사를 세워 니체 전집 등 여러 양서를 펴냈다. 눈코 뜰 새 없는 생활이었고 심신이 지쳐갔다.
“도시인들은 ‘천천히’에 관한 한 문맹이다. 그들은 빨리 먹고, 빨리 만나고, 빨리 헤어지고, 빨리 걷는다. 그들은 ‘빨리빨리’에 중독되어 있다.”
(장석주, 『고독의 권유』, 다산북스, 2013)
그리하여 전원의 삶을 선언하고 수졸재에 거처를 정한지 17년째. 자연의 리듬과 풍성함에 몸을 맡긴 시인의 글은 도시의 삶에 지친 많은 독자를 매혹했다. 새벽의 고독과 숲이 주는 즐거움은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마당을 가로질러 연못으로 나가 수련 잎이 어제보다 조금 더 커졌음을 확인하고, 푸른 부들가지에 물달팽이들이 까만 점처럼 달라붙은 것을 본다. 그는 수련과 부들과 개구리들과 물달팽이들과 함께 맞는 이 아침을 기뻐한다. 『새벽 예찬』, 『고독의 권유』 등 이곳의 자연과 소소한 일상을 담은 책을 여럿 펴냈다. 그리고 이때 쓴 한 편의 시가 광화문 교보문고 글판에 걸리며 유명세를 치렀다. 마침 세상에서 ‘느림’과 ‘전원의 삶’이 화두로 떠올랐을 때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대추 한 알>
하지만 시골 생활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시인의 작업실을 찾은 방문객들이 어둑어둑한 ‘개와 늑대의 시간’을 함께하며 이곳 풍광을 부러워할 때 시인이 강조한 이야기다. 시골 생활은 오히려 ‘전쟁의 연속’이다. 유유자적하고 조용한 삶은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의 말처럼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딜 가든 복잡한 삶은 따라오고 시골은 고요해서 더 시끄럽다.
“이윽고 시골이 고요하리라는 믿음부터가 환상이었음을 절감합니다. 전원 지대가 조용할 때는 농한기뿐이고 그 외 계절은 온갖 농기계가 내는 엔진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떠들썩한 굉음으로 가득하고 쌀 건조기가 내는 소음 등은 밤새도록 이어지기도 합니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바다출판사, 2014)
자연의 리듬과 풍성함에 몸을 맡긴 시인의 글은 도시의 삶에 지친 많은 독자를 매혹했다. ⓒ 경기문화재단
독서의 힘
시인은 어째서 그토록 오래, 쉬지 않고 책을 읽는가? 시인은 그 대답을 프랑스 출신의 문학연구가 츠베탕 토도로프의 말로 대신한다. “문학은 우리가 심각하게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졌을 때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변 다른 사람들에게로 인도하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좀 더 잘 이해하게 해주고 살아가는 일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문학’의 자리에 ‘책’을 넣어도 꼭 맞아떨어진다. 책은 고립된 자아를 넘어 타자들의 사색과 체험이 가득 찬 세계를 열어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풍성한 세계에 초대되는 것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불안과 분노를 가라앉혀 주고, 침체된 기분을 화사하게 하며, 삶의 의욕을 북돋운다. 이러한 위안과 치유의 역할에서 더 나아가 독서는 자신을 다스리고 정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라며 노래, 춤, 웃음, 사랑을 권한다. 더불어 책은 행복이라는 마법을 일으키는 도구라고 주장하며 키케로를 인용한다. “책은 소년의 음식이 되고 노년을 즐겁게 하며… 위급한 때의 도피처가 되고 위로가 된다. 집에서는 쾌락의 종자가 되며 밖에서도 방해물이 되지 않고, 여행할 때는 야간의 반려가 된다.” 확신에 찬 시인의 권유가 이어진다.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읽고, 또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