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비록 결이 다른 삶을 살았지만 여성의 자각을 바탕으로 여성을 해방하는 계몽운동을 중시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뜨거웠던 삶은 ‘성 평등 경기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 조성흠
여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나는 그대들(남성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1934년<삼천리>에 실린 ‘이혼 고백서’ 중)
우리나라 근대 신여성의 효시라 불리는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군수를 지냈으며, 일찍이 개화한 부모의 영향으로 진명여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했다. 1919년 일본 유학 시절 당시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나혜석은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 일본 유학 시절 여자 유학생 학우회 기관지 <여자계>에 조혼을 강요하는 풍습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소설 ‘경희’를 발표하면서 등단하기도 했다.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사진 ⓒ
나혜석은 유학 중 시인 최승구를 만나 사랑했지만 1916년 그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나혜석의 삶에서 전기를 이룬 것은 남편과 함께 떠난 유럽 여행이었다. 3년 가까이 유럽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서구 문화와 문명을 체험하는 사이 페미니즘 의식이 싹텄다.
그는 프랑스의 한 여성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요,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 영어 선생이던 영국의 여성 참정권운동연맹 회원과 인간 평등에 기초한 참정권 운동뿐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 제한, 시험 결혼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귀국 후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서구 유럽의 여성 문제를 소개하며 ‘성 평등’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손가락질당했고, 오히려 파리에서 만나 불 같은 열애를 했던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관계 때문에 이혼을 당하고 만다. 당시 김우영은 기생 신정숙과 동거 중이었다. 자신은 기생과 동거하면서도 아내의 연애는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나혜석은 김우영과의 이혼에 대해 <삼천리>에 장문의 ‘이혼 고백서’를 기고해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가 갖는 차별적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건 ‘바람피우다 이혼당한’, ‘모성을 하찮게 여긴’, ‘죽을 때까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정조를 팽개친 부도덕한 신여성’이라는 꼬리표였다. 사회와 지인들의 냉대 속에서 가난에 시달리고 병들어 거리를 헤매던 나혜석은 결국 1948년 서울 시립 자제원(慈濟院)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의 책임이다
협성여자신학교 시절 최용신(가운데). ⓒ
여성해방과 자유로운 정조 관념을 강력하게 주장한 나혜석과는 궤적이 다른 삶을 산 신여성도 있다. 바로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 최용신이다. 최용신은 식민지 수탈에 의해 피폐된 농촌 사회를 부흥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농촌 계몽운동가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 ⓒ
최용신은 경기도 태생은 아니다. 그는 1909년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일찍이 기독교 전래와 더불어 교회, 학교를 운영하는 등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곳으로 최용신도 일찍이 근대 교육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1928년 원산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해 농촌 계몽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농촌 계몽운동에 대한 관심은 중등학교 시절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루씨여학교 졸업반 시절 1928년 4월 1일 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교문에서 농촌에’라는 글에 “농촌 여성의 향상은 중등교육을 받는 우리의 책임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 생활을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 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라고 주장했다.
최용신의 약혼자였던 김학준의 농촌경제학 강의 모습, 1964년. ⓒ
1931년 학교를 중퇴한 최용신은 농촌 운동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고 감리교 선교사 밀러와 YWCA의 후원으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농촌 계몽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교회 예배당에서 야학으로 시작했으나 학생 수가 늘어나자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천곡학원’이라는 정식 교사를 지어 문맹 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뿐 아니라 산술, 보건, 농촌 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기술, 애국심과 자립심을 북돋우는 의식 계몽 등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과로한 나머지 1935년 1월 스물다섯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농촌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순교자적 활동을 했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수원과 안산에 각각 기념 거리와 기념관 조성
수원 인계동에 있는 나혜석 거리. ⓒ
1990년대 이후 나혜석은 화가이자 작가였고 민족주의자였으며 또 시대를 앞서 여성해방을 주창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고향 수원시는 인계동에 ‘나혜석 거리’를 조성했다. 600m에 이르는 길 양쪽 끝에 나혜석 동상과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지만 즐비한 술집과 음식점 때문에 맛집 거리로 인식되는 경향이 크다.
수원 행궁동에 조성된 나혜석 생가 거리 ⓒ
반면 행궁동에 조성한 나혜석의 생가 거리는 수수하면서도 따듯한 감성이 짙게 배어 있다. 문화재 보호 개발 제한 구역이라 1970∼1980년대에 지은 키 작은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사이로 개성 있는 카페와 공방이 생겨나 이 인근이 행리단길로 불리며 인기를 끌고 있다. 생가 터에는 기념비가 조성되어 있고, 인근 벽에는 나혜석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안산 상록수공원에 있는 ‘최용신기념관’. ⓒ
한편 안산시는 최용신을 기리기 위해 샘골 강습소 자리였던 상록수공원 내에 ‘최용신기념관’을 세웠다. 건국훈장과 <상록수> 초판본(1936년)이 있으며, 국어 교재와 당시의 성경 등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최용신의 얼과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전국 최초로 ‘성 평등 옴부즈만’ 설치
지난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 조건 개선과 참정권 보장을 요구한 게 계기였다. 111주년을 맞아 각계각층에서 여성 인권 신장과 성 평등 사회 실현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계 경제포럼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한국의 성 평등 순위는 149개 나라 중 115위다. 나혜석이 성 평등을 외친 후 근 1세기가 지났지만 우리나라 성 평등은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이다. 성 평등에 도달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나마 경기도는 성 평등 정책을 조금씩 진전시키고 있다. 지난 4월 ‘성 평등 옴부즈만’ 설치를 위해 준비 전담 조직(TF)을 발족한 것. 성 평등 옴부즈만은 도와 시군, 공공 기관 등에서 발생한 성차별•성폭력 피해 사례에 대해 직접 상담 및 조사를 진행하고, 시정 조치와 재발 방지 권고안을
마련하는 일원화된 실행 기구로 전국 최초로 경기도가 설치했다. 경기도 교육여성분과 관계자는 “공공 영역뿐 아니라 민간 영역까지 아우를 수 있다”며 “실질적 성 평등이 실현되는 경기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녀평등’이란 단어 자체가 없었던 억압된 조선에서 여성의 인권을 주목했고,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으로 존중받길 열망했던 나혜석과 농촌 계몽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며 사회 개혁에 앞장섰던 최용신. 경기도를 대표하는 두 신여성이 꿈꾸었던 미래가 100년이 지난 지금 ‘여성이 존중받는 차별없는 성 평등 경기도’로 실현되고 있다.
참고 도서
<나혜석: 못(母)된 감상기> (이영미, 북테라피),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 (나혜석, 가갸날),
<한 국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한 국학 중앙연구 원)
촬영 협조 • 자료 제공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 관, 최용 신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