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나라 조선. 조선시대에 가장 기본적인 유학 학습서였던 소학(小學)에는 ‘추원보본 제사필성(追遠報本 祭祀必誠)’이란 내용이 나온다. ‘먼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여, 제사를 반드시 정성스럽게 지내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우리 선조들은 사람의 근본은 조상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나 안에는 조상이 깃들어 있음과 동시에 후손에게 물려줄 미래가 고여 있어, 나와 자손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상이 확고했던 터였다. 이러한 조상에 대한 자세는 조선 왕릉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유교관이 확고했던 조선에서의 왕릉은 단지 무덤이 아니다. 죽은 왕의 무덤을 성역으로 조성하고, 조상인 선왕의 무덤을 참배, 제사 지냄으로써 백성에게 모범이 되고, 왕실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고히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2009년에 현재 북한 개성에 자리한 태조왕비 신의왕후 제릉과 정종후릉 2기를 제외한 조선왕릉 40기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에서 밝힌 조선왕릉의 보존 가치는 풍수적, 유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 조선의 독특한 건축과 양식을 알 수 있다는 점과, 제례의식인 산릉제례를 통해 지금도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점, 조선왕릉 전체를 국가적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보존 및 관리하고 있는 점 등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조선왕릉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 미학과 미술사의 흐름까지도 알 수 있어 조선왕릉은 더욱 특별하다.
◈ 조선왕릉, 어디까지 가봤니?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영릉(세종대왕릉) 입구(왼쪽)와 세계문화유산 인증 비(오른쪽) ⓒ 유지아 기자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세종시대. 그 중심에 서있던 세종대왕. 재위기간 32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성군 세종대왕의 마지막 자취를 찾아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英陵)을 찾았다.
영릉 정문으로 들어서면 복원된 재실과 세종대왕 동상이 오른쪽에 있고, 왼쪽에는 혼천의, 앙부일구, 측우기 등 세종시대의 다양한 발명품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세종대왕 기념관인 세종전이 있다. 세종전 안에는 집현전 학사도, 대마도 정벌도, 육진개척도 등 회화류 13점과 <농가집성>과 <향약집성방> 등 서책류 16점, 편경과 편종 등 악기류 27점올 포함해 총 87점이 전시되어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멀리 보이는 홍문, 봉분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멀리 보이는 정자각과 봉분, 합장릉 형태의 봉분 ⓒ 유지아 기자
소나무 길을 걷다 보면 왼쪽에 고고한 자태와 유려함을 뽐내듯 커다란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속세와 성역의 경계인 금천교를 지나면 차례로 홍문과 정자각이 보이고 그 위로 봉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 4대왕 세종과 그의 비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英陵)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자 조선 전기의 왕릉 배치 양식이 된 능으로 국조오례의를 따라 조성됐다고 한다.
합장릉의 표식으로 나란히 놓인 혼유석은 본래 차례음식을 차리는 곳이지만, 능제사는 정자각에서 지내기 때문에 혼백들이 혼유석에 앉아 제사 광경을 보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정자각 바로 옆에 위치한 수복방(조선시대에 종묘, 왕릉 등을 관리하거나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지내던 곳)과 수라간은 특수한 예로서, 다른 왕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배치라고 한다.
‘영릉 덕분에 조선이 100년 더 유지될 수 있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천하의 명당으로 꼽히는 영릉은 그 명성에 맞게 아름다운 경치를 선사한다. 특히 추운 겨울의 영릉의 경치는 더욱 감탄스럽다. 유난히 푸른 소나무와 하얀 눈의 조화는 더할 나위가 없다.
세종 인문도시로 도약하고 있는 여주시는 사실 북벌의 고장이기도 하다. 북벌론의 대가이고 효종의 스승인 우암 송시열을 기리는 서원이 있고, 무엇보다 북벌의 중심축이었던 효종의 왕릉 역시 여주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릉(英陵 : 세종대왕릉)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릉(寧陵 : 효종대왕릉)은 영릉(英陵 : 세종대왕릉)과 산길로 연결되어 있어 약 1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효종대왕릉은 세종대왕릉에 비해 찾는 사람이 덜하여 한적함과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조선 17대 왕인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7세 때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즉위한 것이 1649년. 즉위 이후 효종은 강력한 북벌을 주장하며 북벌운동에 앞장섰던 호방한 인물이다. 그런 그의 일생을 표방하듯 영릉에 흐르는 분위기는 고요하지만 장엄하고 엄숙하다. 효종과 그의 비 인선왕후 장씨의 왕릉인 영릉(寧陵)은 정자각 뒤로 왕릉과 왕비릉이 각각 다른 언덕에 위치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왕릉과 왕비릉이 좌우로 나란한 것이 아니라 아래, 위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풍수지리에 의한 의도적인 배치라고 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더 있다. 세종대왕릉과 달리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세조의 유언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 때부터 시작된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성종의 무덤인 선릉(宣陵)부터 다시 출현하였으나 영릉(寧陵)에서 다시 사라져 이후 왕릉 배치에 있어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효종대왕릉은 조선왕릉 중 재실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높다.
◈ 너의 목소리가 들려 – 기대만큼 아쉬움의 목소리도
여주시는 문화재청과 함께 영릉(英陵)·영릉(寧陵) 유적종합정비사업을 추진하여 지난 10월 16일 기공식을 갖고 영릉 일대에 대한 원형 복원과 세종대왕역사전시관 건립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세종대왕역사전시관은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을 찾아온 관람객에게 두 왕의 업적과 정신을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하지만 정작 이 전시관에 전시될 유물 중에는 소장가치가 높은 유물이 거의 없어 ‘알맹이 없는 껍데기’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지난 9일 한글날을 맞아 서울 용산에 국립한글박물관이 개관한 후 많은 관심을 얻은 가운데, 정작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여주 영녕능에는 이렇다 할 유물 한 점 없는 전시관이 건립되고 있어 ‘알맹이 없는 전시관’ 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 현재 영릉 내에 위치한 세종전 역시 다를 바 없는 처지이다. 세종전에 전시된 유물 대부분이 복제품이어서 전시관을 찾은 관광객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 괜찮아, 영릉이야 – 관광객들과 시민들의 지속적인 발걸음 이어져
불과 5년 전의 영녕릉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관리나 정비가 잘 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삭막함이 맴돌았고 사람들의 관심 역시 크게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주시가 세종인문도시의 첫 걸음으로 여주시의 문화재 정비사업을 진행하면서 주변환경이 깨끗하게 정돈되고, 문화재 관리 또한 이전에 비해 체계화되었다. 이후 문화재의 특성을 고려한 행사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그 예로, 해마다 영릉에서는 한글날을 맞이하여 ‘세종문화큰잔치’ 및 전국학생 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또한 매년 5월 15일에 영릉 정자각에서 세종대왕탄신 숭모제전(탄신일을 기념하여 올리는 제사)을 봉행하고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주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영녕릉에선 많은 관광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대수(양평) 씨는 “쇼핑하러 여주에 왔다가 점심 먹고 산책을 할까 하면서 들렀어요. 한적하고 마음이 차분해져 가끔씩 와요. 행사 있을 때도 아이들이랑 오고. 옛날에 비해 행사 규모가 커져서 다양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아요”라며 개선된 영녕릉의 모습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을 살펴보는 의미로 영녕릉을 찾아 조선왕조의 역사를 엿보고, 마음의 휴식을 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