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왕방산 중턱에 자리한 왕장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천년고찰로, 포천시민들의 성지이자 마음의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 경기뉴스광장 허선량
포천 왕방산 중턱에 자리한 왕장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천년고찰로, 포천시민들의 성지이자 마음의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봉선사본말사약지에 의하면 왕산사는 877년 신라 헌강왕 3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창건과 함께 왕이 친히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으므로 산 이름을 왕방산(王方山)이라 하고 절 이름은 왕산사(王山寺)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조선을 세운 태조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咸興)으로 가서 나오지 않으므로 무학 스님이 직접 가 설득해 모셔오던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발길을 돌려 이 절에 머무르며 안정을 되찾고 가면서부터 왕방사라 불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왕산사는 신라시대에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조선시대에 청산스님과 무영스님이 다시 고쳐 지었다. ⓒ 경기뉴스광장 허선량
■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 청산·무영 스님 중창
이러한 왕방사가 어떻게 유지 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1572년 조선 선조 5년에 청암스님과 백운스님이 고쳐 지었고, 1627년 인조 7년에는 청산스님과 무영스님이 다시 고쳐 지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왕산사는 해방 직후 시작된다. 금강산에서 중생구도의 뜻을 품고 수도하던 청매스님이 현재의 왕산사 일대를 돌아본 후 고색창연한 절터에 천년석불이 묻혀있는 꿈을 꾸고 백일기도를 드린다.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미륵불이 현신하는 꿈을 꾸니 이를 계시로 여겨 1947년 이 터에 보덕사라는 절을 짓고 34년간 수행과 포교에 힘쓰니 드나드는 불자 모두가 가피를 입어 명실공히 이 지역의 기도처로 자리매김했다.
청매스님의 뒤를 이어 화정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20년 동안 가람수호와 수도정진에 힘써 오늘의 사세를 확고히 했다.
왕산사 터의 지세를 보면 운이 틔고 복이 들어오는 기운을 갖추고 있다. ⓒ 경기뉴스광장 허선량
■ 운이 틔고 복이 들어오는 기운을 갖춘 왕산사
왕산사 터의 지세를 보면 백두대간에서 시작해 동쪽으로는 오봉산 금강산 향로봉으로 이어졌다.
서쪽으로는 한북정맥이 백암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 국사봉, 왕방산으로 용트림하면서 이어져 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합수지점에 이르러 장명산이 한북정맥의 끝을 맺는다. 바로 이 사이에 왕방산 왕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풍수지리 원전인 ‘장경(葬經)’이나 ‘금낭경(錦囊經)’에 따르면 관지지법(觀支之法) 은은륭륭(隱隱隆隆) 미묘현통(微妙玄通) 길재기중(吉在基中)이라고 하고 있다.
용과 지룡을 보는 법은 은복(隱伏)이 되어 잘 보이지 않으나 돌출되는 용맥의 진행을 잘 관찰해야 하므로 물의 분합 주변의 좋은 봉우리와 영송(迎送) 등이 잘 아우러지는지를 살펴야 한다. 지룡은 물이 고여 만나 멈추는 곳에 사방이 흩어지지 않고 결합을 이루며 왕성한 힘을 얻는다. 이와 같은 곳은 미묘하여서 신묘한 기운과 서로 통하는 길지가 된다.
이러한 지덕을 갖춘 곳이 왕방산 왕산사이다.
왕산사에는 지극정성으로 소원을 빌면 돌이 무거워 떨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되며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는 ‘소원돌’이 있다. ⓒ 경기뉴스광장 허선량
■ 지극정성으로 빌면 원하는 바가 이뤄진다는 ‘소원돌’
2001년 4월 왕산사 주지로 법해 스님이 부임해왔다. 바위와 갈대가 무성한 왕산사는 당시 기도하던 부부와 기도 스님이 상주해 있었다. 그런데 찾아오는 불자들은 대부분 대웅전이 아니라 미륵불을 찾아가므로 기도 스님은 미륵불 앞에 있던 돌멩이를 치웠다.
그러나 찾아오는 불자마다 돌멩이를 찾는 것이었다. 꿈에 본 사람도 있었고 그동안 영험함을 경험한 불자들이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주지 스님은 기도 스님에게 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했는데 기도 스님은 어디에 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감하던 차에 절에서 일하는 처사에게 절 주변의 풀을 모두 뽑으라 했다. 더운 여름날 넓은 범위의 풀을 뽑는 일은 쉽지 않아 고심하고 있던 처사 앞에 주지 스님 뒤를 졸졸 따라오는 개도 아니고 양도 아닌 하얀 털북숭이 짐승이 목격되었다.
그리고는 삼성각 갈림길에서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바로 그 지점에서 돌멩이가 발견되었다. 돌멩이는 제자리에 돌아왔고 기도 스님은 웬일인가 하여 돌멩이를 들어보았으나 들리지 않았다. 주지 스님 역시 그 말을 듣고 달려가 돌멩이를 들었으나 아랫돌과 같이 들려 올라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돌멩이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는 기운이 서린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래서 영험함이 있는 돌멩이라는 것을 알고, 소원돌이라 이름 붙였다. 지극정성으로 소원을 빌면 돌이 무거워 떨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되며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는 경험담도 숱하게 전해오기 시작했다.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가치관이 상실된 혼돈의 시대 속 왕산사는 많은 이들을 위한 참된 삶의 지표와 실천의 등불이 되고 있다. 바쁜 일상 속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고 싶다면 왕산사를 찾아 신묘한 기운을 얻고 소원돌에 원하는 바를 빌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