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삼릉은 조선 8대 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 한씨의 공릉, 조선 9대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순릉, 추존왕 진종과 그의 비 효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영릉을 말한다. 파주 삼릉 영릉 전경. ⓒ 문화재청
‘남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거든 항상 관용할 줄 아는 마음을 간직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실제로 관용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라. 남의 잘못이나 허물에 대해 관용할 줄 모르는 사람의 표정은 항상 미움과 저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자신이 평화를 누리면서 생활하기가 극히 어렵다.’
중국에는 이 같은 관용에 대한 명언이 있다. 항상 너그럽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신하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서 신하들로부터 늘 존경을 받았던 분이 바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이다.
성종은 남달리 학문에 힘쓰는 한편,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올바르고 깨끗한 정치에 힘을 기울였다. 성종은 지방으로 순찰을 나간 한 관리가 일을 부당하게 처리해 주고 그 당시에는 돈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던 비단 열 필을 뇌물로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종은 지방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 관리를 급히 대궐로 불러들여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선물을 관리 앞에 내놓게 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값진 비단 열 필이었다. 그 순간, 관리는 자신이 뇌물을 받은 것이 탄로가 났음을 금세 눈치채고 그만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성종이 너그럽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주자, 관리는 더욱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 관리는 다시는 부정한 일이나 뇌물을 받지 않고 전보다 더욱 나랏일을 마치 내 일처럼 충성을 다해 열심히 보살피게 되었다.
파주 삼릉은 조선 8대 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 한씨의 공릉, 조선 9대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순릉, 추존왕 진종과 그의 비 효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영릉을 통틀어 말한다. 각 능의 앞글자를 따서 공순영릉(恭順永陵)이라고도 한다.
삼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5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보호구역은 132만 3,105㎡로,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봄철 사색을 즐기며 걷기 좋은 곳이다. 2월부터 5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8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관람요금은 1천원이며, 입장권은 17시까지 판매한다. 매주 월요일은 휴일이다.
<중종실록> 1528년(중종 23) 1월 18일 기사에는 세를 위해 수단을 꾸몄다고 의심 받은 순릉의 능참봉에 대한 기록이 있다. 파주 삼릉 순릉 능침. ⓒ 문화재청
■ 조선왕조 왕릉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 ‘능참봉’
조선왕조 500년 세월동안 왕릉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능참봉’이다.
능참봉은 조선시대 최하위직 관료인 종9품으로 오늘날 9급 공무원에 해당한다. 예조에 속했으나 임금의 능을 모시는 일선의 실무자로서 실제 직책보다 높은 권한을 행사했다.
<중종실록> 1528년(중종 23) 1월 18일 기사에는 세를 위해 수단을 꾸몄다고 의심 받은 순릉의 능참봉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공(三公)이 아뢰기를, “순릉(順陵) 참봉 송현(宋俔)은 전 이조 판서 신공제의 집에 분경(奔競 : 관직을 얻으려고 갖은 수단을 쓰는 일)한 것으로 추고를 받았습니다. 의금부는 송현이 판서의 집에 출입한 것으로 의심하여 3차 형문할 것을 계청하였고, 전하는 이를 윤허하셨습니다. 그러나 간관(諫官)이 ‘그가 직령(直領)을 입었었으니 만일 재상을 찾아가 배알하려 했다면 절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직령을 입고 갔겠는가?’ 하였으니, 간관이 어찌 헛된 말을 아뢰었겠습니까? 조관(朝官)이 확실치 않은 일로 여러 차례 형문을 받으니 정상이 실로 애매합니다. 직령을 입었었는지 여부는 그 금란 서리(禁亂書吏)를 심문하소서.”하니, 전교하였다.
“아뢴 말이 지당하다. 나도 서리를 심문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간관은 증거인으로 추고해서는 안 된다고 하므로 부득이 3차로 형추하게 하였다. 발명(發明)한 후에는 자연 공사(公事)가 있을 것이다. 전에 분경죄를 철저히 밝히지 않는다는 말이 여러 차례 소장(疏章)에 진술되었기 때문에 이제 송현을 3차로 계하(啓下)한 것이다. 지금 그 서리를 심문한다 하더라도 어찌 다른 말을 하겠는가?”
위의 기록은 순릉 참봉 송현이 전 이조판서의 집에 출세를 위해 드나들었다는 의심을 사고 있어 그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내용이다.
왕릉을 관리하는 공직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능권무직의 형태로 이어지다가 세조가 관제개혁을 한 이후 능참봉직이 생겼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능참봉직은 비록 종9품에 해당하였지만, 임금의 능을 관리한다는 상징성 때문에 관료진출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뿐 아니라 이제 막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의 청직(淸職)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능참봉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양반의 신분이어야 했다. 보통 생원, 진사 혹은 유학 중에서 임명이 되었으며, 어린 사람보다는 연륜이 있는 자가 임명되었다.
공릉은 조선의 역대 왕후 중 2번째로 수명이 짧았던 장순왕후의 능이다. 파주 삼릉 공릉 전경. ⓒ 문화재청
■ 조선의 역대 왕후 중 2번째로 수명이 짧았던 장순왕후의 ‘공릉’
장순왕후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1460년(세조6) 16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인성대군을 낳고 이듬해 1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가 1472년(성종3)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조선의 역대 왕후 중 2번째로 수명이 짧았던 왕비이다.
공릉은 당초 왕후릉이 아닌 세자빈 묘로 조성되어 초석, 병풍석과 난간 등이 생략되고 양석과 둘레돌을 둘러 무덤을 보호하게 하였다. 봉분 앞에 상석(床石)과 8각의 장명등을 세우고 좌우 양쪽에 문인석 2기를 세웠고 봉분주위로 석마(石馬),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각 2필씩을 두어 능 주변을 호위하고 있다.
능 아래에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 홍살문이 위치하고 있다. 비(碑)에는 조선국장순왕후공릉(朝鮮國章順王后恭陵)이라 새겨져 있다.
공혜왕후의 순릉은 상설제도는 공릉과 유사하나 왕비의 능이므로 석물이 더 많다. 파주 삼릉 순릉 전경. ⓒ 문화재청
■ 장순왕후의 자매 공혜왕후의 ‘순릉’
공혜왕후의 순릉은 상설제도는 공릉과 유사하나 왕비의 능이므로 석물이 더 많다.
공혜왕후 역시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공릉의 장순왕후와 서로 자매지간이다. 1467년(세조13) 11세에 가례를 올렸고 성종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으나 성종 즉위 5년(1474년) 4월 슬하에 자식 없이 1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순릉은 무덤 밑 둘레에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는데, 여기에 표현된 작은 기둥은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을 본받은 것으로 조선 초기 무덤에 쓰인 석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봉분 앞에 상석과 8각의 장명등을 배치하고 양쪽으로 문인석과 망주석 2기를 두었다.
또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각 2필씩을 두어 능 주위를 호위케 하고 있다. 능 아래에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홍살문이 위치하고 있다. 비에는 조선국공혜왕후순릉(朝鮮國恭惠王后順陵)이라 새겨져 있다.
영릉은 조선 제21대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 진종과 그 비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파주 삼릉 영릉 능침. ⓒ 문화재청
■ 왕위에 오르기 전 요절한 효장세자 진종과 그 비 효순왕후 조씨의 ‘영릉’
영릉은 조선 제21대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 진종과 그 비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진종은 1719년(숙종 45)에 태어나 1724년 영조 즉위와 더불어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28년 춘추 10세의 나이로 돌아가 시호를 효장이라 하였다.
1762년 영조는 둘째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위한 뒤 사도세자의 아들인 왕세손(훗날 正祖)을 효장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효장은 정조 즉위 후 영조의 유언에 따라 진종으로 추존되었고 능호도 올려 영릉(永陵)이라 하였다.
효순왕후 조씨는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1727년 13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다음해에 세자의 죽음으로 홀로 되었다가 1751년 춘추 37세로 돌아가 효장세자와 함께 왕후로 추존되었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쌍릉으로 하여 2기의 상석을 앞에 놓았으며 그 중간에 사각옥형의 장명등을 배치하고 문인석 2기와 석양(石羊)·석호(石虎)를 각각 2필씩 배치해 능 주위를 호위케 하였다. 능 아래에는 영조의 명에 의해 옛날 방식으로 세운 정자각(丁字閣)이 있고 비각(碑閣)과 홍살문이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