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암살 사건의 진실 게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암살한 틀수공작원의 인터뷰를 실은 <시사저널> 808호 표지. ⓒ2005 시사저널

1979년 10월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김형욱씨는 1963년 7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6년 3개월간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후 1971년부터 2년간 공화당 의원을 지내다가 1973년 4월15일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후 그는 중앙정보부 부장 재직 때 알게 된 정권의 온갖 비리를 폭로하면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눈엣가시로 등장했다.

특히 1977년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대통령을 맹렬히 공개 비난하면서 유신정권 최대의 골칫거리 중 하나로 등장했다. 김형욱씨가 맹렬하게 반 박정희 운동을 펴자 박대통령은 직접 회유 공작을 지시했다. 또 수많은 회유 사절을 보내 그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허사였다. 급기야 그가 박대통령의 사생활과 사상성까지 시비를 거는 회고록을 출판하려 하자 박대통령은 직접 달러를 싸들고 그와 거래를 시도했다.

그러나 1979년 들어 이 공작은 김형욱씨의 약속 위반으로 무산되었다. 김씨는 박대통령이 뉴욕으로 보낸 윤일균 중앙정보부 차장으로부터 50만 달러를 받고 회고록 복사본을 넘겨줬지만, 원본을 일본 창출판사에 빼돌려 일부 내용을 출판해버린 것이다. 1979년 10월1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김형욱씨는 10월7일 세상 사람들의 눈에서 영원히 사라짐으로써 그동안 한국 현대사 최대 의혹 사건의 한 장본인으로 꼽혀 왔다.

김형욱 실종을 놓고 지금까지 확실하게 정리된 사실은 ‘김형욱씨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현지에서 납치돼 암살당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암살 지휘계통이 ‘박정희-차지철-국내 파견 암살요원-파리현지 중정조직의 협조’이냐 ‘박정희-김재규-파리 현지중정조직원-동유럽 공산주의국가 마피아’이냐를 놓고 진실 게임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지난해 4월11일 <시사저널>을 통해 김형욱 암살 특수공작원의 존재를 알리고, 그와 6개월간 만나면서 추적한 이 사건의 전모를 통해 김형욱의 최후를 보도한 바 있다. 당시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특파시킨 중정출신 특수공작원 ‘천보산’(조00씨)과 곽00씨가 한조가 되어 파리 현지 중정 조직원의 안내를 받아 김형욱을 현장 납치한 뒤 파리 외곽의 산란계 양계장에 설치된 파쇄기에 넣어 흔적도 없이 제거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암살조장을 발굴해 그의 입을 열게 하기까지는 6개월여에 걸쳐 남다른 취재 과정과 열정이 필요했다. ‘특수공작 세계는 모든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간다’는 수칙을 내세워 절대 이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을 돌리는 일 자체가 수월치 않았고, 그의 주장과 신원을 검증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며 그의 집을 찾아가 함께 잠을 자기도 하며 김형욱 암살의 실마리를 풀어내기까지 들인 공력은 내 18년 기자생활 중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었다고 기억한다.

어쨌든 우여곡절을 거쳐 그가 입을 연 김형욱 암살 공작 모의 과정과 침투 루트, 납치 및 암살 과정, 이후 퇴각 과정 등을 상세하게 녹음하고 이를 전직 중정 및 안기부 특수공작원들을 수소문해 들려주고 가능성과 신빙성 여부도 철저히 따져보았다. 그 결과 ‘특수공작 답다’라는 평을 받았다. 또 이후 기자는 일본을 방문 취재해 그가 중정에서 양성한 특수공작원이었다는 결정적 증언과 공작 활약상을 확인했다. 암살 고백자의 조카와 형을 만나 이미 20년 전에 “김형욱은 파리 양계장에서 처치됐다”는 말을 했다는 점도 확인했고, 가족들은 그가 김형욱 암살 공작을 수행한 것으로 김형욱 실종 직후 부터 짐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취재된 김형욱 암살공작의 방대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공작 암호명 천보산 일행은 1978년 11월부터 청와대 경호실(당시 차지철 실장)측의 호출을 받아 암살 기획을 세웠고, 요원은 당시 중정과 인적 교류를 갖고 있던 이스라엘 첩보기구 모사드에 ‘비밀 암살훈련’을 받으러 파견되었으며, 흔적없는 암살 방법으로는 양계장 파쇄기에 집어넣는 방법과 염산공장에서 염산 통에 넣는 방법 두가지 방안을 가지고 현지에 투입되었다가 결국 양계장 파쇄기 암살법을 썼다는 내용 등이다. 또 프랑스 정보기관의 사전 사후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도쿄-텔아비크-이스라엘 하이파항구-지중해 지브롤터해협-북해 도버해협-벨기에 앙베레-프랑스 파리-피레네산맥-스페인-모로코-이스라엘-도쿄에 이르는 치밀한 침투 및 퇴각루트를 택했다는 주장도 특징이었다.

김형욱 암살 조장 발굴 기사가 나가자 세상은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보도 후 나는 마침 당시 국정원 내부에 이른바 ‘과거사 진실위원회’가 설치돼 7대의혹사건 중 하나로 김형욱 실종사건도 다루고 있던 터라서 국정원과 진실위에 천보산을 넘겨 진실규명 조사를 하도록 협조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이 사건 보도가 나가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국정원 핵심 간부와 진실위의 민간인측 교수를 만나서 모든 정보와 취재 내용, 암살 고백자의 신원을 넘겨주며 검증을 요구했지만 이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천보산이 당시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의 지령을 받았다면 그것은 경호실의 과거사지 국정원의 과거사가 아니므로 그를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국정원은 별도로 자기네가 조사하고 있는 내용을 발표하겠다고 했다.

<시사저널>을 통해 천보산의 김형욱 암살 고백이 있은지 두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해 5월26일, 국정원은 마침내 자기네가 믿고 있다는 김형욱 암살 공작 내용을 서둘러 중간 발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파리에 연수중이던 신00이라는 중정 수습 직원에게 김형욱 살해를 지시하고 독침과 소련제 권총을 건네주자 이 연수생은 동유럽 공산권국가 조직폭력배 두명을 10만달러에 고용해 프랑스주재 한국대사관 관용차량으로 파리 교외 길가에 김형욱을 납치해 야산에서 권총으로 사살한 뒤 시체는 낙엽으로 덮어두고 총은 현장에 버린 채 돌아왔다. 연수생 신00은 김형욱 암살공작 전모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혼자서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이 공작은 이후 30년 이상 전혀 발각되지 않은 채 전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공적 암살 공작 사례로 기록된다”.

국정원은 2005년 초반 3개월간 수많은 내부 자료와 관련자를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오로지 신00이라는 연수생의 진술에 의존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공작의 기본도 모르는 이런 발표는 대다수 국민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언론이 비판했듯이 국정원 발표는 상식을 벗어난 허점이 수두룩했다. 김형욱이 암살되기 19일 후면 박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을 갖고 있던 김재규 부장이 ‘유신과 박대통령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그것도 연수생에게 암살을 지시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프랑스 경시청과 정보기관의 실력은 세계를 자랑하는데 버젓이 파리대사관 관용차량을 이용해 김형욱을 납치한 뒤 파리 시민의 산책길 옆에서 권총으로 살해하고 시신도 낙엽만 얹어둔 채 그대로 방치한 뒤 살해 권총마저 시신 곁에 버려두고 왔다고 했다.

심형욱의 시신과 그 옆에 버린 소련제 권총이 26년동안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프랑스라는 나라를 우습게 보는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조사 결과를 발표한 이상 김형욱씨의 유골을 찾아내려는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마땅하지만 국정원은 파리 현지에 가보지도 않고 연수생 말만 발표했다. 이런 발표 자체가 또하나의 허술한 ‘공작’의 산물이라는 의혹을 떨칠 수 없는 대목이다. 중간 발표 후 최종 결과를 발표하겠다던 국정원과거사위는 지금까지도 이 사건 발표를 못하고 있다. 사실상 중간 발표 차제가 ‘실패한 공작’이었음을 자인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정원의 김형욱 암살공작 중간발표에서 가장 큰 문제는 ‘기획된 방향대로만’ 조사를 벌였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김형욱을 암살했다고 주장하고 나온 이는 두사람이다. 한명은 <시사저널>이 발굴한 중정 특수공작원 천보산이었고, 나머지 한사람은 중정 연수생 신00이었다. 국정원은 이 두사람 중 신씨만 조사해 그의 일방적 말을 근거로 결론을 발표했다. 국정원 발표를 본 천보산 조씨는 “내가 거짓말을 했으면 국정원은 나를 고발하라”라며 자기를 배재한 김형욱 암살 결론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국정원이 암살 실행자로 내세운 신00이라는 연수생은 조씨가 파리에서 차로 안내한 바로 그 중정 연수생같다며 대질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이후 가타부타 말이 없이 꿀먹은 벙어리였다.

국정원의 중간 발표를 보면 천보산 조씨의 고백을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무시해도 될만큼 확실한 암살공작은 아니었다. 시사저널 보도와 국정원의 중간발표를 모두 지켜본 과거 중정 공작원들은 “천보산 조씨의 양계장 암살 주장도 석연찮은 구석이 있지만 국정원 발표 내용보다는 훨씬 더 믿을만하고 특수공작원답다”라고 반응하고 있다. 낙엽으로 덮었다는 김형욱씨의 유해를 찾아내 유전자 감식을 벌여 김형욱씨가 확실하다는 점을 증명하고, 살인청부를 맡겼다는 동유럽인 조폭 2명의 신원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국정우너 발표는 지금까지 나온 김형욱 암살 가설 중 가장 수준낮은 소설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중정이 양성한 정식 요원(신00)과 비선 공작원(조00)씨의 각기 다른 두가지 암살 고백은 현재로서는 김형욱 사건의 진실을 둘러싸고 반드시 진위가 철저히 검증돼야 할 주목할만한 주장들일 뿐인 셈이다. 국정원은 최종 조사 결과 발표를 포기함으로써 앞으로두 이 두 주장은 진실의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양계장 암살 고백을 처음으로 이끌어낸 기자라고 해서 무조건 천보산의 주장이 명백한 진실이라고 우기는 것은 아니다. 27년이 지난 역사적 의혹사건을 조사권한도 미흡한 언론인이 파헤치는 데는 한계가 없지 않지만 현재로서는 합리적 믿음이 가는 요소와 민간차원에서는 검증하기 힘든 의미심장한 의혹요소들이 뒤섞인 상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김형욱 암살 사건의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 규명을 위해서는 천보산 조씨의 고백과 국정원측 신씨의 고백은 제3의 기관에서 재조사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자의 입장이다. 현재 가동되고 있는 대통령 직속 과거사진실위원회(위원장 송기인신부)같은 공신력있는 기관에서 두 암살 주장자들을 불러 재검증을 하는 절차가 그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