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북한은 독일 통일 전 동독보다 훨씬 비우호적이다. 내부 통제가 엄격 하다. 과거 동서 베를린처럼 상호간 교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게다가 주변 이해 당사국들의 입장이 다 다르고 북핵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관계정상화를 위해 한국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물론 북한이 과거 동독보다 정치적으로 더 강력하다. 관계정상화는 굉장히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책의 지속성도 필요하고 정치적인 교류만이 아닌, 지자체나 시민단체, 종교계 등 다양한 차원 에서 교류가 진행돼야 한다.”
현지시간 18일 독일 베를린에 있는 라마다 플라자 호텔 회담장. 김성렬 경기도 행정1부지사와 독일 통일 전문가인 베르너 페니히 씨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다. 페니히 씨는 한반도 문제에도 정통하다.
이날 페니히 씨는 ‘공감 통일 아카데미 지자체 리더반’을 대상으로 독일 통일의 교훈에 대해 강연했다. 그는 ”민주적인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양국 간 관계 정상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운을 뗐다.
페니히 씨는 “독일은 처음부터 통일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동독 주민이 겪고 있는 생활의 불편을 인도적으로 변화시키자는 취지에서 관계 정상화에 접근해 통일까지 이루게 됐다”며 “상호간 신뢰와 협력을 통해서만 관계 정상화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서독은 한 지붕 아래 두 가족이란 공통의 인식이 있었다. 서독에서는 ‘동독에 있는 모든 시민이 다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모두가 적은 아니다’라는 인식이 강했다. 독일 통일이 유럽 안전에 이롭다는 주변국들의 시세 판단도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의 강연이 끝나자 김성렬 부지사를 비롯한 지자체장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 때문에 당초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예정됐던 강연이 1시간가량 연장됐다.
김성렬 부지사는 “독일과 달리 한반도는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관계 정상화가 어려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페니히 씨에게 조언을 청했다.
이에 페니히 씨는 “독일은 분단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개선책을 강구했다. 서독은 동독보다 강력하다는 자신감으로 신동방정책을 펼쳤다. 이는 관계정상화로 이어져 동독 시민의 불편함을 해소하면서 공산독재의 권력이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안병용 의정부시장은 “우리 시에는 대한민국에서 미군주둔지가 가장 많다. 그런데 미군이 떠난 자리를 중앙정부가 돈 주고 감정평가를 해 다시 지자체에 팔려고 한다”며 독일도 우리나라와 사정이 비슷한지 물었다.
페니히 씨가 “통일 후 신탁관리청이 동독지역을 보전했는데 지방정부에서 자기네 땅이라고 신청하면 그 땅을 파는 게 아니라 그냥 분할했다”고 답하자 지자체장들의 탄식이 쏟아졌다. 중앙집권화로 지방정부의 권한이 미약한 우리나라와 독일 상황이 대비 됐기 때문이다.
이날 강연을 주관한 베를린자유대 한국어과의 이은정 교수는 이와 관련한 자료를 정리해 경기도와 의정부시에 제공하겠다고 덧붙였다.
강연에는 통일 전후 동서독 양쪽에서 모두 공무원으로 근무한 작센안할트주 막데부르크 시의 환경농업부 국제협력담당인 빌렌보켈 씨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빌렌보켈 씨는 “서독지역인 니더작센주 공무원이었다가 어머니의 영향으로 통일 후 동독지역인 작센안할트주 근무를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미래가 불확실했지만 통일로 인한 변화가 제대로 유지될 거란 생각에 전근을 결정했다”며 “경기도 리더들이 분단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독일 통일을 공부하는 모습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말했다.
오후에 진행된 2부 강연에는 전 베를린 내무차관, 브레멘 내무장관을 지낸 쿠노 뵈제 씨가 강연자로 나섰다. 뵈제 씨는 통일 후 동베를린 출신 경찰 1만명 중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에 부역한 경력이 있는 7천명을 해고한 사례를 소개하며 과거 청산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통일 후 베를린 시는 설문조사를 통해 동독 국민을 억압한 경찰들을 골라냈다. 거짓말로 설문조사를 통과하더라도 동독 비밀경찰이 수집해놓은 감시 자료를 토대로 부역자들을 솎아냈다고 한다.
뵈제 씨는 “과거 청산 문제는 기존의 억압체제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엄격하고 깨끗하게 처리해야 한다”며 “당시 베를린시의 방침에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20여년이 지나 지금까지 다른 주정부에서 과거 청산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보면 베를린시의 결정이 옳았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다시 지자체장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독일식 통일이 역사적·정치적 조건이 다른 한국의 상황에 맞는가, 과거 청산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등의 질문에 빌렌보켈 씨는 “독일 통일을 모델로 생각지 마라. 통일 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며 “염두에 둘 것은 공정성을 기반으로 통일을 통해 어떻게 정의를 찾고 체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느냐”라고 말했다.
이날 강연에서 보인 지자체장들의 뜨거운 반응에 리더반 연수에 참가한 학계 전문가들도 놀라움을 표했다. 장준호 경인교대 교수는 “강연장이 통일에 대한 토론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며 “서독은 처음부터 통일을 목표로 한 게 아니다. 동독과 소통, 협력을 도모하다 통일까지 이르게 됐다. 이번 연수를 통해 경기도 지자체장들도 통일의 필요성을 깨달아 북한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발판을 마련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성렬 부지사는 “좋은 강연이었다. 특히 미군주둔지의 활용 권한을 전적으로 지방정부가 지녔던 독일 사례에 대한 자료를 확보해 앞으로 경기북부 미반환공여지 개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해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날 강연에 이어 리더반은 1953년 설립된 이주민긴급등록시설인 ‘마리엔 펠데’를 방문했다. 이곳은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하거나 여행, 이주할 때 임시거처를 제공하고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비자를 발급하는 등의 행정서비스를 제공한 역사적 현장이다. 통일 이후 당시 상황을 기록해 박물관으로 꾸며졌다.
저녁에 리더반은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 초청 만찬회에도 참석해 문태영 대사와 독일 통일과 현지 사정에 대한 간담을 나눴다.
리더반은 다음날 동독지역 있었던 드레스덴으로 이동, 성공적인 투자유치로 꼽히는 폭스바겐 공장을 견학하고, 드레스덴 제1부시장을 만나 통일 이후 겪은 변화와 성장 원동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