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 6.25전쟁 62주년 기념식
일시 : 6월25일
장소 : 수원 경기도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
기념사 :
6?25 전쟁 62주년 기념식을 준비해주신 우리 6?25 참전 유공자이외에 경기도 지부장님과 참전 용사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
군경회 유족회 지부장님과 여러분들, 미망인 지부장님과 유가족 여러분들, 그 동안에 여러 어려움 속에서 아직까지 북한에 포로로 잡힌 국군포로 가족들도 계시고 많은 이산가족들이 아직까지 우리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이 모든 분들께 감사와 위로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이분들의 공로를 잊지 않고 이분들의 아픔을 잊지 않고 이분들의 가족을 그리는 간절한 그리움을 잊지 않고 반드시 보답하고 또 위로하고 만날 수 있도록 상봉의 길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일선현장에서 대한민국을 지키는,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세계 최강의 공대인 제3군사령부 사령관님 그리고 보병제 51사단장님 등 군 모든 군관계자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또 이 자리에 학생들의 안보 국방을 더 강화시키기 위해 참석한 김상곤 교육감님, 또 많은 보훈 유공자를 위해서 좋은 지원을 해주시는 보훈청장님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재향군인 회장님, 광복회장님 그리고 징수 월남전 참전 회장님 여러 관계자분들께서 함께 자리를 참석해주셨습니다.
625는 지나간 것이고 뭘 기념하느냐, 그 아픈 상처를 기념할게 뭐가 있는냐는 이야기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해서 오늘도 보면 많이들 안 오시고 생각하기도 싫다, 끔찍하다, 아프다 하시는 분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전 세계 역사에서 이렇게 참혹한 역사가 있었느냐, 우리 역사 속에서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이처럼 동족상잔의 끔찍한 일을 겪은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 6?25를 통해서 아직까지 휴전이기 때문에 많은 상처가 있고 숙제가 있습니다. 국군 포로도 아직까지 많이 생존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해를 발굴 한다마는 사실 미군이 자기 국민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지극한 정성에 비한다면 그동안 소홀했습니다.
보훈가족 여러분에게도 충분히 못 해드렸습니다. 6?25 기념식은 전쟁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왜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어떤 피해를 입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남겨진 전쟁의 상처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러한 끔찍한 전쟁으로부터 고통 받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을 한자리에서 생각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자리가 6?25 기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가 6?25에 대해서 공부를 안 하고 있습니다. 저도 조금 전에 이 영상을 봤지만 잘 만들었습니다. 이런 좋은 교육 자료가 우리 학생들에게 젊은이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저도 6?25를 맞이하여 다시 한번 공부를 해봤습니다.
첫째로 저도 6?25 도중에 태어났지만 아직까지도 남침이다, 북침이다 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이 우리를 침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북한을 침략했다는 사람들도 우리 속에 있습니다. 참 답답한 이야기지만 그런데 지금 아시다시피 소련이 망했기 때문에 소련의 모든 비밀문서가 다 드러났습니다. 그 자료를 우리 정부가 입수하고 연구했습니다. 앞으로 통일되면 북한의 비밀문서도 서류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6.25 북한군의 남침이 일어난 것은, 첫째는 북한이 이것을 주도로 한 것은 사실 계속 김일성이 주도했습니다. 기록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가서 스탈린에세 계속 이야기 했습니다. 6?25 일어나기 1년 전이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 가서 스탈린에게 남침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북한이 압도적 우위는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 때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군은 북한군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소총, 대포, 전차, 전투기 이런 것들을 전폭 강화시켰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50년 4월 전쟁일 일어나기 전인 4월에도 김일성과 박헌영이 다시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때 다시 남침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후 스탈린이 전쟁을 해도 좋다고 한 이유 첫째는 미군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 방문에서 미군이 49년 6월에 6?25전쟁 일어나기 일년 전에 미군이 철수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변화입니다.
두 번째로 중국이 공산당이 그 동안에 중국 대륙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장개석 군을 밀어내고 대륙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가지 변화, 미군이 철수를 하고 중공군이 딱 잡았기에 스탈린이 이제 좋다고 허락했다.
그래서 스탈린이 한 말이 당신들이 모택동한테 가서 다시 도장을 받아와라, 그래서 모택동을 찾아갔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전쟁 일어나기 한달 전인데, 모택동으로써는 어렵다, 모택동은 대만을 먼저 점령 해야지 남한에 전쟁 일어난 것은 감당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 소련 공산당이 세계 공산당을 총 지휘하고 스탈린의 그 의지에 의해 모택동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로 남한 내 20만 명의 남로당원이 있었습니다. 소위 종북파가 요즘 말로 20만명의 남로당 비밀당원들이 여기서 게릴라도 하고 빨치산도 하고 비밀활동을 했는데 남로당은 20만명 있었습니다.
박헌영이 말하기를 전쟁만 일어나면, 서울만 함락시키면, 다른 나머지 지역은 남로당이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나서 전쟁할 필요 없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련도 그렇게 생각하고 스탈린도 그렇게 생각하고 김일성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북한군이 서울만 함락하면 끝난다고 보았습니다. 서울만 함락하면 전쟁이 다 끝난다고 생각해서 사실 공산당들이 장기계획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을 함락했는데 조금 후에 미군이 즉시 참전했습니다. 당시 우리 군 전력 자체는 북한군이 압도적으로 우월했고 남한은 사실 오합지졸에 가까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당시 북침통일까지 이야기 했지만 사실 허장성세에 가까웠습니다. 말로만 하는 소리지 지금 우리 군에 비하면 준비가 안 되고 형편없는 우리 군대였습니다. 그래서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형편없이 무너졌습니다. 일부에선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데 그렇게 되면 한반도 평화는 유지되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여러 차원에서 우리가 할 일은, 첫째 강력한 국민적 합의론, 국방 안보의 역량을 강화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 젊은이들에게 국사를 교육하고 공부해 전쟁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순신 장군도 중요하지만 아니라 바로 지금 60년 전에 있었던 이 6?25전쟁의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6?25의 영웅 참전용사들 우리 군인들 미군들 맥아더 장군을 공부해야 하는데 이 공부가 제대로 안된 것이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심지어는 북침이었다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공부 가르치는 선생도 있습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국방안보의 역량 강화 국민들의 정신, 우리 국사에 대한 확고한 이해, 확고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미군은 사실 평택 보다는 판문점부터 휴전선에 주둔하는 게 우리 평화에 가장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평화 유지에 강력한 방어가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학생들도 모든 학생이 영어 수학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나라 국사에 대해서는 적어도 모든 국민이 알아야 합니다. 태정태세문단세 보다는 바로 1945년부터 해방이후 우리나라가 어떻게 나누어지고 이 공부를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가장 아픈 시간 가장 아픈 상처 6?25라는 이날을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에 필수 과목이 6?25의 역사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시 여러분들이 곳곳에 갈 때마다 이러한 내용을 전파하는데 애써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참전 용사님들 하고 계십니다만 우리 학생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세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아픈 6?25 전쟁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좋은 공부와 다짐의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참전 유공자들에게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