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재 발간에 대한 설명자료
22일 일부 언론에 경기도 역사 교재 발간 보도와 관련, 경기도 입장을 아래와 같이 설명드립니다.
□ 설명내용
1. 역사 교재 발간 취지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늘 “공직자의 생명은 뜨거운 애국심과 투철한 국가관에 있다.”라고 강조해왔습니다.
애국심과 국가관은 대한민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동안 편향적인 역사교육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번 경기도 역사 교재 발간은 신규 공직자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고취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일부보도에서는 전체 교재의 일부분만 인용하고 있어 인용된 문장의 앞·뒤 전체 문단을 올려드립니다.
1) 인용된 문장 :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의 공산주의 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에 저항하여 일으킨 무장 반란이었다.(71쪽)
⇒ 전체문장
? 제주4·3사건은 제주도의 공산주의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에 저항하여 일으킨 무장 반란이었다. 반란을 주도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책임자인 김달삼은 7월 북한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투쟁 결과를 보고하고 북한 정권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달삼은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무장 항쟁이 거세었던 만큼 그것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 작전도 과도하게 잔인하였다. 그에 따라 무고한 양민의 인명 피해가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양민과 반란세력의 구분이 쉽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군경의 낮은 인권 의식이 그 같은 참극의 배경을 이루었다.
이후 2003년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4·3사건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있었음을 사과하고 유족에 대해 피해 보상을 행하였다. 한국인의 인권 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그 같은 국가적 사과와 보상이 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사건의 본질에 대해 2008년 북한의 노동신문과 그에 동조하는 국내의 일부 세력은 “4·3봉기는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의 식민지예속화과 민족분열책동에 반대하고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정의의 대중적 무장항쟁이었다.”고 60년 전과 꼭 마찬가지로 왜곡하였다.
2) 인용된 문장 : 그(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그토록 낮은 것은 대다수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의 나라 만들기 과정에서 그가 담당했던 절대적 역할과 그 성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158쪽)
⇒ 전체문장
? 그(이승만)의 퇴진이 명예스럽지 못하였지만 그가 남긴 역사적 유산은 거대하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존속할 수 있었을까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나라 만들기’의 초기 과정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1965년 그가 사망하였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위한 조사에서 그를 가리켜 ‘건국의 원훈’이라 하였다. 그의 완강한 반공주의는 이후의 역대 정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계승되었다. 대한민국은 여타 신생국과 달리 그의 국가정체성에서 커다란 혼란을 겪지 않았다. 반공주의에 기초한 이 나라의 국가정체성은 이 나라가 조만간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정착시키고 시장경제체제에 의한 경제적 번영을 추구함에 있어서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그가 무리하게 추구한 대통령직선제와 대통령중심제 정부형태는 그의 하야 이후 민주당 정부의 내각책임제 실험이 실패로 끝난 뒤 박정희정부에 의해 복구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와 그의 비판세력 사이의 정부형태를 둘러싼 경쟁은 그의 죽음 이후에야 그의 승리로 판명이 났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대통령직선제를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민주정치의 가장 소중한 제도적 기초로 받들고 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국민의 심판을 받은 독재자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가 그토록 낮은 것은 대다수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의 ‘나라 만들기’ 과정에서 그가 담당했던 절대적 역할과 그 성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여전히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공산주의세력과 타협해서라도 통일국가를 세웠어야 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운영하기에 충분한 문명 수준에 있었다는 근거를 의심해도 좋을 민족주의적 환상이 일반 국민의 역사의식으로 확산되어 온 것도 다른 한편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3) 인용된 문장 : 5.16이 일어나자 대다수의 국민은 올 것이 왔다면서 그것을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173쪽)
⇒ 전체문장
5·16이 일어나자 대다수의 국민은 “올 것이 왔다”면서 그것을 암묵적으로 지지하였다. 윤보선 대통령도 박정희 소장을 접견하면서 첫마디로 “올 것이 왔구나”라고 하였다. 장면 정부의 대변지나 다를 바 없었던 경향신문도 사설에서 “이와 같은 사태를 초래하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말해서 기성정치인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과 부패, 무능과 파쟁의 소치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감을 짙게 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기성정치인의 무능, 부패, 당쟁에 따른 정치와 사회의 방종, 그에 따른 국가정체성의 혼란은 대다수 국민으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고칠 수 있는 과감한 개혁을 소망케 하였다.
나아가 일부 국민은 5·16으로부터 4·19정신이 올바로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4·19와 5·16은 동일한 목표를 갖는다.”면서 5·16을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으로 환영하였다. 재야의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도 그러하였다. 함석헌은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라면서 4·19와 5·16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4·19를 전후한 시대정신은 한마디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 곧 근대화였다. 분단과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건설하여 절대 빈곤으로부터 하루빨리 탈출하는 근대화 내지 산업화야말로 당시 사람들의 지배적 관심사였다. 그리하여 4·19로 집권한 민주당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선포하였다. 장면 국무총리는 “당면한 민족적 과제인 경제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장기개발계획’을 실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말 뿐이었다. 그것을 실행할 강력한 의지와 능력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목도한 것은 당쟁과 그에 따른 혼란의 연속이었다.
?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일부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이 그에 동조하고 참여하였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평론 잡지인 『사상계』의 편집인 장준하는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사상계』에 기고해 온 일부 언론인과 지식인도 그 같은 입장을 공유하였다. 고려대학교 총장 유진오는 혁명세력의 추대를 받아 재건국민본부의 본부장에 취임하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5·16 당일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혁명공약이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