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9일 한경대 특강
[손학규 지사 특강 전문]
오늘 특강의 제목이 “글로벌 시대와 대학생의 도전정신”입니다. 여러분 혹시 앨리슨 래퍼를 아십니까? 저는 얼마 전 열린 영어마을 인재포럼의 주제 강사로 앨리슨 래퍼를 초청한 바 있습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양팔이 없고, 다리는 무릎까지 밖에 내려오지 않는 장애인입니다. 그런데도 아기를 낳아서 열심히 기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구족화가로 성공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TV로 앨리슨 래퍼가 휠체어 타고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휠체어를 누가 밀던가요? 아들이? 아닙니다. 어깨로 레버를 움직여서 스스로 몰고 다닙니다. 그녀는 왼팔이 완전히 없습니다. 오른팔은 관절부분만 조금 돌출돼 있죠. 그걸로 휠체어를 몹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그녀에게는 자기 소유의 재규어 스포츠카가 있습니다. 제가 차를 얼마나 빨리 모는 지 물어보니까 시속 100마일은 밟을 수 있다더군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왼발로 가속기와 브레이크를 밟고, 오른발로 와이퍼나 방향전환신호를 조작합니다. 그리고 핸들 대신 오른쪽 어깨로 레버를 움직여 방향을 운전을 즐깁니다. 더욱 놀라운 건 승마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온몸을 사용해서 말이죠. 그 신체조건으로 차를 몰고, 승마를 하겠다고 생각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죠.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해 믿음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세살 반 때부터 입과 발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번은 어떤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고 있었는데 지인 중 하나가 “너는 네 몸이 그러니까 남들만 그리는 게 아닐까”라고 얘기하자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고 합니다. 정말 내 몸이 추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어느 날 비너스 상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비너스다! 일종의 자기 발견이었던 셈이죠. 그리곤 자기 몸을 사진기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팔을 쓸 수 없으므로 구도를 만들어 지시하면서요. 그렇게 세계적인 구족화가이자 사진작가, 앨리슨 래퍼가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얘기를 돌려서 경기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경기도는 해외 첨단기업 유치를 통해 제 임기동안 일자리 80만개를 만들어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 파주에 문을 연 LG필립스 LCD단지 아시죠? 2003년 2월에 저는 LG필립스와 투자협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3년 2개월 만에 7세대 LCD공장을 가동시켰습니다. 공장 하나에 축구장 여섯 개가 들어가는 거대 규모를 자랑하죠. 이 공장 부지를 조성할 때 역내에 묘지만 491기가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묘지 하나마다 공무원 한 명씩 배정해 설날, 제삿날, 환갑날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이장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한겨울에 5천 평짜리 천막을 치고 온풍기를 돌려 언 땅을 녹여가며 문화재를 발굴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행정처리와 부지조성만 2~3년 걸리는 걸 1년 만에 끝내고 착공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로도 LG필립스가 요구한 기한을 맞추기 위해 도로, 상수도, 하수처리장 등을 만들고 전기를 끌어오느라 쉴 겨를이 없었습니다. 결국 최소 5년이 소요될 일을 3년 2개월 만에 마치고 파주에서 7세대 LCD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LG필립스 건을 따내기 위해 우리 경기도는 타이완과 경쟁을 벌였는데요. 만약 거기 갔으면 지금쯤 타이완이 세계 LCD의 본산이 됐겠죠. 그걸 대한민국으로 끌고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세계 제일의 LCD 종주국 자리를 차지한 겁니다. 뿐만 아니라 LG필립스 LCD단지에서 창출할 일자리가 4만2천개, 연관단지까지 합치면 10만개에 달할 것입니다. 이처럼 저는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드는 일에 심혈을 쏟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처음부터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을까요?
저는 주식이라곤 단 한 주도 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재산도 광명에 있는 아파트 한 채가 고작입니다. 학창 시절엔 <재벌과 빈곤>이라는 책을 끼고 다니며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대학 졸업하고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참, 그 전에 한전시험을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월급을 많이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조위원장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전 노조위원장이 돼 어느 날 갑자기 서울 시내 불을 다 꺼버리면 혁명의 커다란 횃불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런데 시험공부를 안 해서 그런지 다행히도 떨어졌습니다. 그 후 작가 황석영 선생과 함께 자취를 하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펼쳤습니다. 목 공장에 위장 취업해 한창 조직사업에 몰두하던 어느 날 아는 선배가 거기 간부로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당시는 노동운동을 위해 위장취업을 하면 불문곡직 간첩으로 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데로 옮길까 고민하던 중 박형규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노동운동보다 중요한 게 빈민운동이라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그 즈음 청계천 일대는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했던 가난한 농민들이 빈민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판잣집에서는 옆방의 숨소리까지 다 들리더군요. 사람이 연탄가스에 질식해 숨지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났죠. 그곳에서 사람들을 아우르며 빈민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중간에 유신체제에 반대하다가 감옥에도 다녀왔죠.
어제가 어버이날이니까 제 어머니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저 때문에 걱정이 많았죠. 대학 들어가고부터는 학교 앞 술집 쌍과부집이 제 강의실이었습니다. 책은 <들어라 양키들아>, <재벌과 빈곤> 같은 운동서적만 봤습니다. 당시에 불렀던 반미노래 하나 들어보시겠습니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미국대사관이 불탄다. 잘 탄다, 잘 타. 신난다, 신나. 양키들은 카메라만 돌린다.” 한일회담 반대투쟁 하면서 부른 반미노래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서는 데모만 하고, 군대서는 보안대에 끌려 다니며,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은 안 하고 노도 못 하시고 말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침엔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낮에는 인분으로 거름을 치며 밭을 일궈 저를 키웠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막내 때문에 큰형이 경찰서, 정보부를 불려 다니는 걸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래도 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저였습니다. 당연히 기업은 안중에도 없었죠. 기업 하면 오히려 전태일 열사와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런 저에게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 서거였습니다. 박 대통령 서거 직전 부마항쟁 조사차 현지에 내려갔던 저는 체포돼 김해보안대에 끌려갔습니다. 심문도 없고 오로지 두들겨 맞기만 했습니다. 서울서 대공수사단장이 내려와 “손학규 너 여기 있었구나” 할 때는 이제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할 일만 남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잠잠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풀어주더군요. 그리고 박 대통령이 사흘 전에 서거했단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제서야 혁명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 어린 시절 사진까지 모두 찢어 없앴던 제가, 노동운동을 하느라 용접자격증까지 갖고 있던 제가 세계로 눈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서울의 봄이 찾아오자 저는 그동안 연계했던 국제 인권운동 단체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교수가 되고자 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세계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점차 세계 속에서 하나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첨단산업을 육성하고 일자리 창출하는 것이야 말로 21세기 대한민국이 살 길입니다. 그 한 가운데 세계 속의 경기도가 있습니다. 이를 위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으로 영어마을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이 아무리 쫓아와도 대한민국이 동북아의 허브가 될 수 있다는 걸 믿습니다. 이것이 한경대의 비전이 되고, 여러분 같은 대학생들의 비전이 돼야 합니다.
세계 속의 경기도는 애초 세계수준을 따라잡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의 것을 세계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뀌었습니다. 글로벌라이제이션, 글로컬라이제이션에 이어 이제 세계무대에서 지역단위 별로 경쟁하며 지방이 세계를 이끄는 로커벌라이제이션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경기영어마을은 중국, 일본은 물론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의 BBC, 미국의 ABC 방송이 취재해 갈 만큼 세계적인 명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것을 세계최고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됐습니다.
앨리슨 래퍼는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스스로 발견했습니다. 여러분 역시 대학생으로서 그 가능성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초석을 만들었다는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지사로서 혼자 살기 어려운 소외계층을 위해 최선의 서비스를 다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고급 일자리를 만드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껍데기를 깨야 합니다. 오늘의 강연이 글로벌 시대에 여러분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