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초 봄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는 화창한 봄날, 경기도미술관이 술렁였다. 피부색이 하얀 이방인들이 미술관 기획전시실을 점령(?)했고, 미술관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지게차도 드나들었다. 가끔은 전시실의 벽면에 불꽃이 일고, 형형색색의 페인트도 동원됐다. 경기도미술관을 찾은 수상한 방문객들의 행적을 쫓았다.
경기도미술관의 프랑스 벽화 전시 <그림이 된 벽>을 위해 프랑스 도멘 드 케르게넥 미술관의 올리비에 들라발라드 관장을 비롯해 4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프랑스 현대미술가 8명이 내한했다. ⓒ G-Life
경기도미술관의 수상한 방문객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벽’이란 무엇일까? 벽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집이나 방 따위의 둘레를 막은 수직 건조물’,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나 장애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관계나 교류의 단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등으로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경기도미술관에서의 벽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하나의 캔버스이자 그 자체가 작품인 것.
봄날의 미술관이 술렁였던 것은 경기도미술관의 올해 첫 기획전시이자 국제전인 <그림이 된 벽(MUR/MURS, la peinture au-dela du tableau)> 때문이었다. 경기도미술관은 프랑스 벽화 전시 <그림이 된 벽>을 4월 19일부터 6월 17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를 위해 프랑스 도멘 드 케르게넥 미술관의 올리비에 들라발라드 관장을 비롯해 4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프랑스 현대미술가 8명이 내한했다. 모두 국제 비엔날레에 초청되거나 프랑스 현대미술사에 기록될 만큼 명성이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전시장 벽을 화폭 삼아 칠하거나 긁고 그슬리며 벽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전시 끝나면 사라지는 일시적 회화의 매력
전시 개막을 며칠 앞두고 막바지 작업에 한창인 작가들을 직접 만났다. 가장 먼저 기자를 반겨준 이는 올리비에 들라발라드 관장이었다. 이번 전시를 공동 기획한 도멘 드 케르게넥 미술관은 프랑스 모르비앙주에서 케르게넥 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다.
올리비에 들라발라드 관장은 “지난 2015~2016년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도멘 드 케르게넥 미술관에서 경기도미술관의 단색화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 <단색화>전이 열렸는데, 이번 전시는 그에 상응하는 자리”라며 “우리들의 전시가 경기도미술관의 첫 기획전시를 장식하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작가마다 추구하는 작업 방식이나 소재, 아이디어가 다른 만큼 회화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면서 “특히 이번 전시는 전시 기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일시적 회화’로, 한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삶과도 닮았다. 그 특별한 전시를 꼭 누려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올리비에 들라발라드 관장의 가이드를 바탕으로 직접 전시실을 둘러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야노스 베르의 작품이었다. 야노스 베르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에르메스와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젤에 캔버스를 올리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캔버스 천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거대한 붓을 세워 든 채 선을 긋는다. 그렇게 선을 완성하는 동안 그 사이에 존재하는 흰 바탕까지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선을 완성하는 주요한 요소이자 또 하나의 선으로 의미를 갖게 된다.
야노스 베르는 “내 작품과 건축물, 즉 벽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 공간의 의미가 달라졌다. 이곳에서 벽은 작품을 걸고 부각시키기 위한 배경 장치가 아니라 회화의 한 요소이자 작품의 일부”라고 강조했다.
수아직 스토크비스 作 ⓒ G-Life
기획전시실의 마지막 공간에서 만난 수아직 스토크비스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네덜란드 출신의 추상화가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하얀 벽면 위를 빨간 직선이나 사각형 등으로 채웠다. 회화의 기본 요소인 색과 형태를 별다른 꾸밈없이 오롯이 드러낸 것.
수아직 스토크비스는 “넓은 작업 무대 덕분에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됐다”면서 “한국의 문화를 접하고 세월호의 아픔을 간직한 안산이라는 도시를 방문하면서 내면의 영역이 확장된 느낌”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하며 작품 기증 깜짝 발표
수아직 스토크비스와 공간의 벽을 나눠 쓴 크리스티앙 자카르는 불을 이용해 벽에 그을음을 남기면서 추상적인 패턴을 만들어 내는 작가다. 그의 작품 속 ‘불에 타고 남은 젤의 흔적’과 ‘검은 재투성이 벽’은 삶과 죽음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떠올리게 한다. 작업의 특성상 그는 물감이나 붓 대신 불과 연소성 젤을 작업도구로 사용한다. 크리스티앙 자카르는 “20년 동안 일시적 회화 작업을 했는데, 이번 작품이 가장 큰 규모”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크리스티앙 자카르 作 ⓒ G-Life
크리스티앙 자카르는 내한 중 깜짝 발표로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경기도미술관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전시 기간에만 존재하는 한시적 작품이다. 전시가 끝나면 아쉽지만 해체되거나 덧칠해져 사라지게 된다. 사라지는 것까지가 일시적 회화의 한 요소이자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도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전시가 끝나면 사라질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레 기증을 결정한 데에는 숨은 사연이 있었다. “경기도미술관에서 작업을 하면서 미술관 앞에 있는 건물이 궁금해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세월호의 비극을 알게 됐고, 이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삶과 죽음을 표현한 그의 작품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품을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우연의 일치가 작품에 더 큰 의미를 선사하고 더욱 빛나게 해줬다”고 덧붙였다.
한 바퀴 둘러본 전시장은 그림이 벽이요, 벽이 곧 그림인,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이었다. ‘프랑스 현대미술의 흐름을 조망하는 기회’라거나,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게 한다’는 등의 어려운 설명으로 포장하지 않겠다. 프랑스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고,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리고 이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는 볼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그림이 된 벽>을 보러 가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 그림이 된 벽
MUR / MURS la peinture au-dela du tableau |
참여작가
야노스 베르(Janos BER), 클레르 콜랭 콜랭(Claire COLIN-COLLIN), 미셸 뒤포르(Michel DUPORT), 크리스티앙 자카르(Christian JACCARD), 크리스티앙 로피탈(Christian LHOPITAL), 올리비에 노틀레(Olivier NOTTELLET), 에밀리 사트르(Emilie SATRE), 수아직 스토크비스(Soizic STOKVIS)
기간 4월 19일(목) ~ 6월 17일(일) /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 경기도미술관 기획전시실
요금 무료
문의 031-481-7000
홈페이지 gmoma.ggcf.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