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은 단기 ’4346′년이 되는 개천절이다. 고조선 이후 한반도는 많은 왜적의 침입을 받았다. 그 이유는 아름다운 강산을 자랑함과 동시에 지리적으로 뛰어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지혜와 슬기로 한반도를 지켰다. 특히 적의 습격에 대비해서 많은 성(城)을 쌓았다. 우리 경기도는 한반도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성(城)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수많은 왜적의 침입에도 꿋꿋하게 한반도의 숨결을 지켜준 경기도의 성(城)을 소개하기 위해 기획 탐방을 해보기로 했다.
<경기도의 성(城) 탐방 첫번째-오산시 독산산성>
독산산성은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위치해있고 세마대지와 함께 경기도 사적 제 140호로 지정돼 있다.

세마대 ⓒ 이현수/꿈나무기자단

독산성길 ⓒ 이현수/꿈나무기자단
백제 때 쌓은 독산성은 도성의 문호와 관련된 전략적 요충지로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서 임진왜란 때까지 이용되었다.특히 선조 26년 1593년에 권율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당시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 장군은 명나라 군사들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서 군사 2만여 명과 함께 북상하다가 독산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독산성은 전략적 요충지이나 물이 부족한 것이 큰 단점이었다. 그래서 대군이 장시간 머무르기가 어려웠다. 독산성까지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는 독산성 일대가 벌거숭이 산임을 보고 물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부하로 하여금 물 한 지게를 산으로 올려보내서 성안의 군사들을 움직이게 했다.
이에 권율 장군은 물이 풍부해 보이도록 하기 위해 꾀를 내었다. 그는 성 안 서장대에 장막을 치고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군사들을 시켜서 백마를 성 위로 데리고 올라가 흰쌀로 목욕을 시키는 시늉을 하게 했다. 잔치를 벌이는 모습은 곡식과 물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기에 충분했다. 산꼭대기에도 말을 씻길 정도로 물이 풍부한 것처럼 속일 수 있었다. 결국 왜군은 장기간 싸우더라도 승산이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퇴각했다고 한다.

독산성길 ⓒ 이현수/꿈나무기자단
이때부터 독산산성의 서장대를 세마대(洗馬臺)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독산성의 예는 주변의 모범이 되어서 다른 성에서도 군량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이후 독산성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었고 1796년(정조 20년) 수원성의 축조와 함께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세마대는 1957년에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독산성에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보적사’라는 오래된 사찰도 있으니 함께 방문해보는 것도 좋겠다.

보적사로 통하는 해탈의 문 ⓒ 이현수/꿈나무기자단
탐방 중에 만난 한 초등학생은 “독산성 세마대에 오르니 수원, 화성, 오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물러나는 왜적을 보며 기뻐하는 권율 장군과 군사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아요.” 라며 책을 통해서 알았던 세마대를 눈으로 직접 보니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한국의 건축예술에 관심이 많다는 미국인 쌤 씨는 “얼마 전에는 화성을 방문했습니다. 화성은 마을 전체를 수호한 것 같고 독산성은 높은 곳에서 적군의 움직임을 살펴 진입을 막은 것 같습니다. 화성은 크고 웅장합니다. 독산성은 작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적을 막아낸 정성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방문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독산성에서 본 화성시 ⓒ 이현수/꿈나무기자단

독산성 ⓒ 이현수/꿈나무기자단

미국인 쌤과 함께 ⓒ 이현수/꿈나무기자단
꿈기자가 탐방한 독산성과 세마대는 가볍게 둘러보며 역사도 배울 수 있는 좋은 문화유적지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이곳에 들러 다양한 역사탐방과 문화체험을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