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예술기행’은 문학·영화 등 예술작품에 등장하는 도내 지역을 탐방해 소개하는 기획시리즈입니다. 세 번째로 소개하는 지역은 ‘광명시’입니다. 광명시는 기형도 시인(1960~1989)이 생전에 살았던 곳입니다. 광명시 소하동 집터, 기형도 문화공원, 안양천 등을 찾아 기형도의 문학과 공간에 대해 살펴봤습니다.[편집자 주]
기형도 시인 집터 앞 옹벽에 설치된 집터 알림판. 광명시 운산고교 문학동아리 학생들과 선생님이 함께 세웠다. ⓒ 경기G뉴스 유제훈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기형도 시(詩), <안개> 일부)
1970~80년대 수도권은 서울의 위성 같은 기능을 담당했다. 특히 도시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지방에 거주하는 많은 이들이 생계를 위해 수도권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시로 온다’는 릴케의 말이 정답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분명 존재했다.
서울은 외지인들의 이주로 인해 늘 만원이었다. 점차 서울에서 서울 주변 수도권의 여러 도시로 인구가 분포되기 시작했다.
도시는 화려한 이미지를 갖추고, 세상의 온갖 것들이 섞인 혼돈의 공간이었다. 사건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일간신문의 사회면에서 게재된 일들은 문학작품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80년대 도시의 문법을 알기 위해선 당대에 써진 글들을 볼 필요가 있다. 시인 기형도(1960~1989)의 등단작 시(詩) ‘안개’는 산업화가 진행 중인, 공단이 위치한 수도권 도심 속의 음울한 배경을 미학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기형도 시인과 함께 문학동인(안양 ‘수리 시(詩)동인’) 활동을 했던 조동범 시인은 “기형도 시인의 등단작 ‘안개’는 1980년대의 신춘문예 시의 전형적인 틀을 갖고 있다”며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는 1980년대 공단이 있는 도시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형도는 1960년 3월 13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 연평리 392번지에서 태어나 1989년 3월 7일 서울의 어느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는 안성 천주교 공원묘원(‘10 다-12호’)에 묻혔다.
또한 기형도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면서 공식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해 정치부를 거쳐,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근무했다.
기형도 시인이 살았던 집터 자리. 사진 속 작은 사진은 기형도 시인이 살았던 집 사진(ⓒ<기형도 문학 전집>(문학과 지성사 刊)). ⓒ 경기G뉴스 유제훈
등단작 ‘안개’는 1965년 부친이 서해안 간척사업 실패로 유랑하다가 정착한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와 안양공단 등이 배경이다. 소하리는 급속한 사업화에 밀린 철거민, 수혜 이주민의 정착촌이 되기도 했다.
기형도의 작품 속에선 도심의 음울한 삽화들이 몽환적으로 그려진다. 조동범 시인의 안내로 기형도 시인이 살았던 광명시와 안양천 일대를 찾아 시인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기형도 작품에서 키워드가 되는 공간은 광명시와 안양시로 삼을 수 있을 듯하다. 두 도시는 이제 수도권의 대표적인 산업도시가 됐지만, 기형도 시 속에서의 두 공간은 ‘둥지’ 같은 곳처럼 비춰진다.
그가 머물던 여러 공간은 다양한 작품으로 옮겨졌다. 빈곤한 유년시절의 기억은 감수성 어린 문장으로 탄생했고, 많은 문청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많은 이들이 현재까지 읽고 있는 유작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간(刊), 1989년) 속에서 쉽게 유추해볼 수 있었다.
기형도가 다섯 살 때 이사를 와서 죽기 전까지 살았던 광명시로 발길을 옮겼다. 광명시는 1981년 7월 시흥군에서의 일부 지역(원광명이었던 시흥군 서면 광명3리(현 KTX역 일원)와 시흥군 서면이었던 소하동)이 광명시로 승격(7개 동으로 개편)되면서 시작됐다.
특히 현재 관할구역상 광명시 광명7동인 ‘원광명(元光明)’은 원래 ‘광명리(里)’가 시작된 곳이라는 점에서 원광명으로 불린다.
또한 원광명의 이칭인 ‘괭매’는 마을의 지세가 풍수로 보아 ‘광명두’(등잔을 얹어 놓는 기구)와 유사해 비롯된 이름으로, ‘廣明’, ‘光明’ 등의 의미가 담겼다. 이같은 내용은 광명시의 명칭이 유래된 기원이다.
광명시의 기원은 1970~80년대 도시 이주민들 삶의 역사였다. 기형도의 시에서 도시 이주민들의 삶은 공장에 다니는 누이, 병으로 쓰러진 아버지,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 등의 이야기로 표현된다.
1969년의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시, ‘위험한 가계·1969)고, (1975년) 누이의 죽음으로 인해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시, ‘나리 나리 개나리’)이라고 읊조리기도 했다.
특히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시, ‘바람의 집-겨울 판화1’)의 기억 속에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 시장에 간 우리 엄마 /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시, ‘엄마 걱정’)있던 일들을 오롯이 그리워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기형도 시인이 살았던 집터는 시에서 매입을 시도했으나 여러문제로 인해 현재 사유지가 돼 커다란 창고가 세워져 있었고, 집터 앞의 옹벽에 광명시 운산고 문학동아리에서 세운 ‘기형도 시인의 집터 알림판’이 오롯이 그 자리를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집터를 가르는 길은 ‘광명시 메모리얼 파크’(납골시설)로 향해 있어 쓸쓸한 공간으로 보였다.
광명시 소하동. 시인이 생존했던 시절에는 이 인근은 허허벌판이었고, 서울과 광명을 오가는 버스 종점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과 광명을 오가는 시인의 발길 속에서 그가 마주한 풍경들은 시(詩)로 태어났다. 서울의 위성도시(광명, 안양) 안에 기형도의 시(詩)가 등대처럼 존재하는 셈이었다.
그는 도시의 시인이었다. 1980년대의 ‘도시 문학’을 알기 위해선 그의 문학을 필수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1980년대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나서면 곧바로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가 확연했다. 특히 서울와 경기도의 경계 이정표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도시의 경계는 확연히 차이가 생긴다. 서울 외의 수도권 지역은 개발이 아직 되지 못한 도심이나 농촌이 대부분이었다.
광명시 소하동에 위치한 기형도 문화공원의 시비들. 이 곳에 기형도 문학관이 건립될 예정이다. ⓒ 경기G뉴스 유제훈
광명시와 서울 금천구 사이를 흐르는 안양천. 안양천은 기형도 시인의 작품 모티브가 된 곳이다. ⓒ 경기G뉴스 유제훈
수도권의 도심으로 들어오면 공장이 보인다. 공장이 있는 공단에 들어서야 비로소 도시라는 이름을 획득한다. 광명시는 도시지역과 농촌지역이 병존하는 지역이다. 기형도에게 있어서 ‘도시’라는 공간은 추모의 공간이자 우리나라 경제성장기의 기록으로 읽힌다.
지금은 KTX 광명역이 생기면서 논밭이었던 곳은 대형마트 등이 들어서면서 부심에서 도심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의 시 속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볼 수 있는 안양천도 변했다. 서울 금천구, 경기도 광명과 안양 등의 일대를 흐르는 ‘안양천’은 현재 많이 정비돼 도심 속 산책공간으로 변했다.
시인이 살아있던 시절의 안양천은 공단의 폐수로 인해 악취가 심한 곳이었다. 등단작 ‘안개’로 유추해볼 수 있는 풍경은 물고기도 살 수 없는 공간에 사람들이 `가축들처럼` 그로테스크하게 `긴 방죽 위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특히 공단 일대에 사는 도시빈민의 비루한 삶을 감수성의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문학적 감수성은 이 시대까지도 현재형이다. 기형도의 문학은 수도권 위성도시의 공단과 이주민들의 삶을 엿볼수 있기 때문이다.
광명시 일대는 현재 아파트 주거단지가 많이 세워진 곳이지만, 1970년도 까지만 해도 공단이 중심이 된 산업화의 황량한 풍경이 대다수였다. 이제는 산업화의 상징인 ‘공업 도시’가 됐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기에서 서울의 배후 역할을 해온 수도권의 신산스러운 도시 이주민들의 이야기들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동범 시인은 “지금은 서울이 확장돼 수도권 도시와의 경계의 차이가 없으나,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이쪽(광명시 등)까지 (교통편이 좋지 않아) 내려오는 일이 어려웠다”며 “1970년대 광명과 안양은 공단이 들어서면서 지방에 거주했던 이주민들이 찾아온, 고단하고 가난한 삶의 모습을 볼수 있었던 곳이다. 시인의 가족도 연평에서 이주해 정착한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오는 2017년이면 광명시 기형도 문화공원에 ‘기형도 문학관’이 건립될 예정이다. 시인을 그리워하는 광명시민들이 주축이 된 기형도 시인 기념사업회의 노력으로 이뤄지게 됐다.
광명시는 현재 기형도문학관 건립을 위해 실시설계를 진행 중이며, 실시설계가 완료되는 4월경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에 따라 광명시는 오는 4월 광명시 소하동 산 144번지 ‘기형도 문화공원’(5만11㎡) 내 공원관리사무소 부지에 28억5천500만 원을 들여(실시설계비 1억2천만 원 포함) 연면적 881.42㎡의 규모로 ‘기형도 문학관’ 착공에 들어가 내년 6월 완공할 계획이다.
특히 기형도 문학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전시관(1층), 사무실 및 소규모 도서관(2층), 강당‧수장고‧창작공간(3층) 등으로 구성됐다.
광명시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기형도 문학관은 광명시 출신의 작가 기형도를 추모하고, 문화정체성을 확립하는 공간으로 세워질 것”이라며 “문학관 건립 후, 기형도의 시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창작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동범 시인이 회상하는 기형도 시인은? |
조동범 시인이 기형도 시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 경기G뉴스 유제훈
“고1 겨울방학 때, (수리 시동인) 시화전이 열린 (안양) 전람회 커피숍에서 만난 기형도 시인의 첫인상은 선한 느낌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어려운 선배였는데, 선배가 시를 봐주신 일은 나에게 행운입니다.”
조동범 시인이 만난 기형도 시인의 이야기다. 당시 기형도 시인은 막 등단을 한 시기였고, 일년에 몇 차례 수리 시동인 행사가 있을 때 참석했다고 한다.
조 시인은 “기형도 선배가 술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노래는 참 잘했다”며 “‘명태’라는 곡이 애창곡이었다. 성악가처럼 노래를 불러서 깜짝 놀랐다”고 설명했다.
수리 시동인은 7명이 활동을 했고, 조동범 시인이 막내였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조 시인보다 위로 10살이 높은 터울의 선배들이었다. 1981년 기형도 시인이 안양 동사무소에서 방위병 복무를 하던 시절에 ‘수리 시동인’에 참여로 시작된 인연이었다.
안양시 도심상권인 안양1번가의 술집 ‘통나무집’, ‘전람회 커피숍’, ‘안양다방’ 등은 수리 시동인의 시화전이 진행된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 시절 기형도 시인은 친구들 사이에서 ‘수용’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일종의 ‘호’(號)였다. 물처럼 유연하다는 인상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노래도 잘 불렀지만,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동인 시화전 알림지에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이 ‘수용’으로 기재돼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 시인은 “기형도 시인은 늙지 않는 시인이 됐으면 한다”며 “젊어서 죽었지만 지금처럼 늙지 않는 시인으로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조동범 시인이 소장 중인 기형도 시인의 사진과 수리 시동인 시화전 팸플릿. 팸플릿은 기형도 시인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 조동범 시인
|
■ 기형도 시인 연보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 문학과지성사
- 1960년 3월 13일 인천시 옹진군 연평리 출생.
- 1867년 시흥초등학교 입학.
- 1975년 5월, 바로 위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 이 사건이 깊은 상흔을 남김.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
- 1976년 중앙고등학교 입학.
- 1979년 연세대 정법대 정법계열 입학. 교내 문학 서클 ‘연세문학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 수업 시작. 교내 신문 <연세춘추>에서 제정, 시상하는 ‘박영준 문학상’에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 입선.
- 1984년 중앙일보사 입사.
-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로 당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신문사에서는 수습 후 정치부로 배속.
- 1986년 문화부로 자리 옮김. 문학과 출판을 담당, 관련 인사와 활발한 교류.
- 1989년 3월 7일,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음.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 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