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제공∙파주시
나라를 잘 이끌 훌륭한 왕자를 얻으려는 정성으로 고려 13대왕 선종과 원희궁비가 조성한 석불입상의 영험함은 잉태의 성스러운 영역을 믿는 이들에겐 진실이고, 부부간의 정성은 군왕도 예외일 수 없다는 상징이 되어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현재도 아이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석불의 기운을 받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
아이를 원하는 요즘 부부들에겐 계획 임신, 시험관 아기,입양과 같은 발달된 의학 시술과 좋은 사회제도가 있다. 계획 임신은 부부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시험관 아기는 불임부부에게 희망이고, 입양은 부족한 가족관계를 채워줄 수 있다. 이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당사자가 결정해야할 문제이고, 그 결과도 선택을 행한 부부의 몫이다. 그러고 보면 임신과 양육이란 문제를 부부 당사자의 몫으로만 인식하는 지금의 시대가 조금은 버겁다.
우리 역사를 보면 삼국~ 고려~조선시대까지 임신과 양육은 남녀의 합방이나 혹은 의술에 의해서가 아닌, ‘하늘 뜻과 치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신령스러운 영역이었다. 우리는 현재 최첨단과학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비과학적이고 미신적 요소는 배제하더라도, 임신과 양육을 대하는 선조들의 성스러운 태도와 정성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조상은 남녀가 만나고, 동침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그 아이에게 내재된 하늘의 뜻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동량지재(棟梁之材)의 욕심을 가진 부부들은 합방 전 부터 정성을 들이는 게 일상이었다. 부부가 함께 보약을 먹고, 좋은 기운의 장소를 찾고, 성현들의 서책을 가까이 하고, 튼튼한 아이를 가진 여인의 속옷까지 마련하는 등 갖은 노력을 했다. 그렇게 정성을 바쳐 태어난 자식의 훈육은 서릿발 같았지만 그 자식이 좋아하는 부분은, 그것이 놀이일지라도 눈감아주고 기다려주는 아량을 베풀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정성과 자식에게 내재된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선종과 원희궁비의 사연
치성과 하늘의 뜻을 따랐던 과거의 많은 사례 중에서 고려시대 선종 때의 일은 주목할 만하다. 고려 제13대 군주선종(1049~1094년)에게는 제1비 정신현비, 제2비 사숙왕후, 제3비 원신궁주가 있었다. 정신현비는 선종(재위 1083~1094년)의 왕자시절 연화공주를 낳고 죽었다. 선종은 왕위에 오르자 왕자 시절 결혼한 연화궁비를 왕후(사숙왕후)로 책봉했다.

고려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호텔이라고 할 수 있는 혜음원지. ⓒ 사진제공∙파주시
제3비 원신궁주는 선종의 왕위 등극 후 맞이한 부인인데, 원신궁주와 정신현비는 인척관계였다. 원신궁주는 이자연의 손녀였고, 정신현비는 이자연의 동생 이자상의 손녀였다. 전하는 말로는 정신현비가 죽자 바로 이 자연 집 안에서는 자신들의 혈족을 국원후(선종)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유는 선종에겐 질환이 있어 다음 왕위는 둘째 국원후가 이을 가능성이 짙었기 때문이다. 국원후와 혼인한 정신현비의 인척인 원희궁비(원신궁주)는 선종의 즉위 후 제3비가 된 것. 선종의 자손으로는 정신현비의 소생연화공주, 사숙왕후에게서 얻은 헌종과 공주, 원신궁주가 낳은 왕자 윤(한산후)이 있었다. 사숙왕후의 소생인 헌종(1084~1097년)은 선종이 35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장남으로 원신궁주소생인 윤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상이 역사기록이다.
그런데 원희궁비에게는 3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그중 한 왕자가 헌종과 같은 나이였던 걸로 추측된다. 여기에는 사연이 숨어 있다. 선종이 죽고 11세의헌종(재위1094~1097년)이 즉위하자 그 친모인 사숙 왕후는 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였다. 어리고 병약한 헌종을 대신한 사숙태후는 왕의 보필보다는 자신의 정치기구를 설치하는데 급급했다. 이에 원희궁비의 오빠이자 의가 병약한 왕과 태후에 의해 농락되는 왕권을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거사를 도모했다. 이자의에 의해 옹립된 왕은 헌종과 같은 해에 태어난 원희궁비의 왕자 윤이었다. 그러나 거사는 헌종의 숙부계림 공에게 발각되어 이자의와 그 일파들은 주살되고 말았다.
역사와 전하는 말 중 어느 것이 맞든, 선종과 원희궁비의 결혼 시기가 왕위 등극 시절이든 왕자 시절이든, 헌종과 한산후의 나이가 어떠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선종 이후의 역사는 선종과 원희궁비의 결혼이 왕위 등극 이후이며,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헌종보다 어렸다는 것을 기록할 뿐이다. 그리고 선종과 원희궁비가 정성을 쏟은 생전의 역작,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을 초라한 돌상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선종과 원희궁비의 역작은 잉태의 성스러운 영역을 믿는 이들에겐 진실이고, 부부간의 정성은 군왕도 예외일 수 없다는 상징이 되어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보물 제93호 용미리 석불 입상
‘용미리 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은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 자락에 위치한 용암사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시대제작으로 보이는 용미리 석불입상은 보물 제93호로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쌍미륵 석불이다. 천연 바위벽을 그대로 이용해 그 위에 목, 머리,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놓은 2구(軀)의거대한석불이다. 바위의제약으로신체비율이조화를이루지는못하지만위압감과토속적인맛이동시에느껴지는독특한작품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불상(원립불[圓笠佛])은 사각형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 안동마애석불과 비슷하다. 그러나 안동마애석불에 비해 정신적인 불성(佛性)은 적어 보이며 세속적이고 민속적인 얼굴로 변화되었다. 양손은 가슴에 들어올려 연꽃을 잡고 있는데 이는 관촉사미륵보살상, 대조사미륵 보살상처럼 용미리 석불입상 역시 미륵보살상으로 추측되는 부분이다. 오른쪽 사각형의 갓을 쓴 석불(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 모양만 다를 뿐 신체 부위의 조각수법은 왼쪽석불과 비슷하다.
구전에 의하면 원립불은 남상(男像), 방립불은 여상(女像)으로 전하여진다. 고려시대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까지 맞이했으나 여전히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를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밤 꿈을 꾸었는데 두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하고 사라져버렸다. 꿈에서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고하였고,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냈다. 장지산에 다녀온 사람이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 하였다. 이에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정성을 드렸다. 그러자 그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파주시청 자료)
파주시 자료에 따르면 용미리 석불입상에는 지금도 아이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석불의 기운을 받기 위해 많이 찾고 있다고 말한다.
왕과 왕비의 절절한 자식 소망
아무튼 왕자를 소망하여 건립한 석불까지 조성한 선종에게 석불건립 전부터 왕자가 있었다는 소문이 붙어 다닌 이유는 무얼까? 그 답 역시 용미리 석불입상에서 찾을 수 있다. 용미리 석불입상에는 선종의 절절한 소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선종에게는 총명한 동모제(同母弟∙같은 어머니에게서 낳은 형제) 5명이 있었다. 그 중 계림공은 근면, 검소, 과단성을 갖추었음은 물론이고 부인 이외의 여자를 취하지 않았다. 학문도 해박하여 오경(五經), 제자서(諸子書), 사서(史書) 등에 능통했다. 그런 까닭에 선종의 아버지 문종이 계림공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
“후일 왕실이 기울어지면 이를 바로 잡아 부흥시킬 왕자는 너뿐이다.” 내치(內治)와 외교로 고려를 반석에 올린 문종이 계림공에게 내린 극찬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선종은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종의 예견이 틀려야 하고, 그러려면 자신의 동생인 계림공에 필적하는 왕자를 얻어야했다. 이에 제3비인 원희궁비가 선종의 뜻을 받들어 정성을 들였고, 다행히 하늘의 뜻을 받은 현몽을 꾸었다. 그리고 곧바로 사숙왕후와 원희궁비에게서 태기가 있었고 왕자를 얻었다. 두 왕자 중 원희궁비의 소생은 석불처럼 후덕하고 똑똑했다. 선종은 이 사실을 석불에 기록하고 백성에게 알렸다. 그러나 선종은 자신의 왕자가 계림공을 대적할 수 없고, 아버지 문종의 예견이 정확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약의 효험을 따져본들 무엇하랴. 덧없는 인생을 시작하였으니 끝이 없을 수 있으랴, 선행을 닦아 청청한 곳에 올라 부처에게 예를 드리는 것이 일심의원이다.” 죽기 2년 전, 병이 들어 선종이 지은 시는 만백성을 안타깝게 했다. 인생의 덧없음, 부처를 향한 일심을 읊조린 선종의 회한은 현실이 되었다. 선종이 죽고 난 다음해(1095년)인 헌종1년 정월 초하루에 그 조짐이 일기 시작한다. “해의 곁에 혜성이 있음은 근신(近臣)의 난이 있을 징조이니, 제후 중에 반(反)하려는 자가 있겠습니다.” 천체의 변화를 지켜보던 태사(太史)가 헌종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조정의 일을 몰랐던 헌종은 태사의 진언을 간파하지 못했다. 같은 해에 태사의 진언처럼 원희궁비의 오빠 이자의가 반란을 꾀하였고, 그 모반은 계림공에 의해 진압되었다. ‘선종의총명한아우들, 문종의 예견, 왕실을 부흥시킬 계림공’이란 입방아가 돌더니 “선종이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기에 이런 반란이 일어났다”는 애석함이 백성들에게 각인되어 갔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계림공은 조카 헌종을 폐하고, 스스로 제15대 왕(숙종)으로 즉위했다. 즉위한숙종은원희궁비와그녀의소생왕자들을귀양보냈고, 그들의 생사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원희궁비와 그녀의 소생 왕자들의 생사(生死)는 숙종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운부분이었다. 원희궁비는하늘의계시를받아선종과함께거대한석불을건립했던주인공이고, 그공적과믿음만큼은백성들도인정하는부분이기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숙종을 지지하는 일파는 석불에 깃든 원희궁비의 기록을 최대한 허구로 만들어야 했다. 이미 용미리 석불입상을 만들기 전에 선종에게는 왕자가 있었다는 따위의 소문 등 말이다. 이후 숙종 6년에 이자의 사건 연루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졌고, 숙종의 뒤를 이은 맏아들 예종은 연화공주를 사랑해 왕비(경화왕비)로 맞이하였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고승이 아닌 자식을 원한 부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건립한 주인공들의 집념이 숨겨져 있다. 더욱 정겨운 것은 왕의 고귀함이 아닌 백성을 닮은 투박한 모습이다. 그것은 용미리 석불입상을 다듬었을 백성들 또한 그 속에 자신들의 자손에 대한 포부를 쏟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자식을 만들고 훈육하는 우리 스스로도 하늘의 뜻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생명을 탄생시키고 훈육이 필요하지만 하늘의 뜻이 내재된 배우자 또한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탄생과 훈육에만 안달하다가는 자신과 배우자에게 내재된 하늘의 뜻은 망각하게 된다. 그리 되면 자식에게 내재된 하늘의 뜻도 쉽게 무시되게 마련이다. 용미리 석불입상 돌아보고 시간이 남는다면 근처에 있는 혜음원지(고려전기국가에서 설립한 호텔)를 둘러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