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는 동구릉 서오릉 영릉 홍유릉 장릉 광릉 서삼릉 융건릉 등 많은 왕릉이 있다. 그중 우리나라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효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융`건릉이 있다. 융건릉은 장릉, 동구릉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융릉의 모습 ⓒ 임도희/꿈나무기자단

융건릉 세계유산 기념비 ⓒ 임도희/꿈나무기자단
융건릉은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장조(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융릉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와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왕후가 함께 모셔진 릉이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영우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고 난 뒤,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 붙였다. 아버지를 닮아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의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융릉의 정자각 ⓒ 임도희/꿈나무기자단
건릉은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순조 21년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다 김조순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주장으로 길지를 찾아 순조 21년 1821년 정조의 릉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건릉의 모습 ⓒ 임도희/꿈나무기자단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효자는 장조이다. 장조는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22대 정조의 생부이다. 장조는 1735년 1월 21일 영빈 이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장조가 2세가 되던 해인 1736년 3월 15일 왕세자에 책봉되고, 1744년 10세의 나이로 영의정 홍봉한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되었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 1월 23일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모함을 하여 영조와 세자 간의 갈등이 일어났다. 1762년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숨지게 하였다. 이 때 세자의 나이는 28세였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래서 장조는 지금 `사도세자` 라고 불리기도 한다. 장조가 죽은 뒤 여러 사람이 슬퍼하였다.
융건릉에 가면 가장 처음으로 약 140년 동안 산 향나무가 눈에 뛴다.

융건릉을 140 년 동안 지켜온 향나무 ⓒ 임도희/꿈나무기자단
입구에 있는 역사문화관에는 융건릉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고. 조선시대의 왕릉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역사문화관을 관람한후 융건릉에 가본다면 좀더 릉에 대한 이해가 쉽게 느껴진다. 융건릉은 슬픈 역사를 품고 있는 장소 이기도 하지만 어느 때 가도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는 왕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