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를 닮은 최용신 선생의 가슴 아픈 일대기, 연극 `상록수연가` ⓒ 달콤한나의도시경기도(블로그)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노래 <상록수>가 안산문화예술의전당 해돋이극장에 울려 퍼집니다, 연극 <상록수 연가 - 아이야 늘 푸르러라>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고운 선율입니다. 연극에 푹 빠진 관객들은 연신 붉어진 눈물을 훔침니다. 그렇게 배우와 관객들은 `최용신`이란 이름 아래 하나가 됩니다. 뜨거운 감동을 안고 숭고한 그 이름을 목 놓아 외쳐 봅니다.
‘배움을 외친 이’를 배우다
“배우십시오, 여러분! 배워야 합니다!” 한복 단정히 차려입은 숙녀가 무대를 마을삼아 돕니다. 일제강점기의 숨 막히는 올가미를 농촌계몽의 의지로 단호히 끊어버린 최용신 선생입니다. 샘골 마을 주민으로 분한 배우들은 그녀를 본체만체합니다. “입에 풀칠하기도 막막한데 무슨 글공부람!” 그 말을 들은 최 선생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웁니다.
상록수를 닮은 최용신 선생의 가슴 아픈 일대기, 연극 `상록수연가` ⓒ 달콤한나의도시경기도(블로그)
안타까운 건 최 선생뿐만이 아닙니다.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만 봐야 하는 관객 수백 명도 애가 타들어갑니다. 여기저기서 “에휴!”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엄마 품에 안겨 칭얼거릴 나이의 어린아이도, 머리 희끗희끗한 어르신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1930년대로 돌아가 최 선생이 느껴야 했던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껴봅니다.
상록수를 닮은 최용신 선생의 가슴 아픈 일대기, 연극 `상록수연가` ⓒ 달콤한나의도시경기도(블로그)
허나 그도 잠시, 그녀는 사시사철 푸르른 상록수처럼 고개를 빳빳하게 세웁니다. 그리고 다시 외칩니다. “배워야 여러분이 제대로 삽니다! 배우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최용신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상록수연가-아이야 늘 푸르러라>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토록 배움의 중요성을 외치던 최용신 선생에 대해 배워갑니다.
상록수를 닮은 최용신 선생의 가슴 아픈 일대기, 연극 `상록수연가` ⓒ 달콤한나의도시경기도(블로그)
연극으로 재탄생한 최 선생의 일생
어린 소녀는 농촌이 좋았습니다. 자연 속에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 좋았고, 배우지 못해 핍박당하기 일쑤인 그 사람들이 안쓰러웠습니다. 어린 최용신 선생은 그래서 중등학교 시절부터 농촌계몽운동을 꿈꿨습니다.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던 1928년, 그 꽃다운 나이 19세에 그녀는 <조선일보>에 ‘교문에서 농촌으로’라는 글을 기고하며 배운 이들이 농촌에 가서 계몽의 빛이 되어야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듬해인 1929년부터 황해도 수안군 용현리, 경북 포항군 옥마동 등으로 계몽봉사활동을 나선 최 선생은 1931년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천곡)에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상록수를 닮은 최용신 선생의 가슴 아픈 일대기, 연극 `상록수연가` ⓒ 달콤한나의도시경기도(블로그)
처음은 무엇이든 녹록치 않은가 봅니다. 최 선생의 샘골 생활도 그랬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냉소와 패배주의로 무장해 있었습니다. “세상을 모르는 젊은 여자가 뭘 할 수 있겠냐”며 그녀를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최 선생은 그보다 더 단단하고 강한 무기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농촌을 계몽해 조선 독립의 기틀을 만들자’는 굳은 신념이었습니다.
상록수를 닮은 최용신 선생의 가슴 아픈 일대기, 연극 `상록수연가` ⓒ 달콤한나의도시경기도(블로그)
금세 포기하고 떠날 줄 알았던 최 선생이 헌신적인 활동을 보여주자, 그녀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무허가였던 샘골강습소를 인가 신청하고 증축 계획을 세우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활동에 나섰습니다. 곧 샘골의 첫 정식 교육기관 ‘천곡학원’이 탄생했습니다.
상록수를 닮은 최용신 선생의 가슴 아픈 일대기, 연극 `상록수연가` ⓒ 달콤한나의도시경기도(블로그)
최 선생은 쉴 새가 없었습니다. 교육 활동과 함께 마을 발전에 필요한 여러 운동들을 벌였습니다. 마을 사정이 점점 나아졌습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몸은 점점 피폐해져가고 있었습니다. 1934년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고베로 떠난 그녀는 건강 문제로 6개월 만에 샘골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농촌계몽운동의 끈은 절대 놓을 수 없었습니다. 최 선생은 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끝내 병마가 그녀를 쓰러뜨렸습니다. 각기병과 과로로 몸저 누운 그녀의 건강은 좋아질 기미가 안 보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1935년 1월 23일, 한철 피고 지는 꽃처럼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연극 <상록수연가-아이야 늘 푸르러라>는 용맹하면서도 기구한 최용신 선생의 25년 인생을 담담히 그려나갔습니다. 최 선생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상여가 무대로 들어오자 샘골 마을 주민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흐느꼈습니다. 아울러 관객들도 손수건을 손에 부여잡고 눈 밖으로 밀려나오는 슬픔을 닦았습니다. 최용신 선생은 그렇게 해돋이극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가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상록수를 닮은 최용신 선생의 가슴 아픈 일대기, 연극 `상록수연가` ⓒ 달콤한나의도시경기도(블로그)
푸르른 상록수 되어 후세에 빛나다
해돋이극장에는 연극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기 한 시간여 전부터 최용신 선생과 관련된 체험거리가 아이들을 반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상록수연가 배지’를 만드는가 하면 매일 일기를 썼다는 최 선생을 본받으라는 의미를 담은 ‘최용신 상록수일기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최 선생이 살았을 당시 입었던 단정하고 고운 한복을 직접 입어보고 사진을 찍는 공간도 마련되어있었습니다.
상록수를 닮은 최용신 선생의 가슴 아픈 일대기, 연극 `상록수연가` ⓒ 달콤한나의도시경기도(블로그)
이번 공연은 선착순 무료 관람으로 진행됐습니다. 최용신 선생의 일대기를 목격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긴 줄을 서야 했음에도 연신 싱글벙글이었습니다. 줄을 서고 있던 한 어머니가 귀띔했습니다. “연극도 무료로 보고 아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체험공간도 있어 정말 좋아요. 앞으로도 저렴하면서도 수준 높은 문화 행사가 많이 열렸으면 좋겠어요.”
상록수를 닮은 최용신 선생의 가슴 아픈 일대기, 연극 `상록수연가` ⓒ 달콤한나의도시경기도(블로그)
두 시간 연극을 감상한 뒤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눈은 하나 같이 불그레했습니다. 모두들 최 선생과 함께 울었던 겁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뿌듯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훌륭한 위인을 알게 됐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일생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관객들의 얼굴을 보기 좋게 만든 것이겠죠. 비록 살아생전 최 선생의 꿈은 못 다 피었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신념을 믿고 행동했던 그녀의 일생은 활짝 꽃피었습니다. 이곳 안산문화예술의전당 해돋이극장 무대에서, <상록수연가-아이야 늘 푸르러라>라는 푸르른 이름으로 말입니다.
최용신 기념관 Information
주소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샘골서길 64번지 최용신기념관
관람시간 : 09:00~18:00
관람료 : 무료 문의전화 : 031)481-3040
홈페이지 : choiyongsin.iansan.net
※ 매주 월요일 및 설, 추석 연휴 휴관
[출처/달콤한 나의 도시, 경기도]
[글. 사진: 달콤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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