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3월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깨진 유리창 이론’을 공동 발표했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것.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깨진 유리창 이론’의 대표적인 곳이었던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3동 양화로 일대에 변화가 일고 있다.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사업으로 우범지대 개선 ⓒ 강현욱 기자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3동 양화로 지역은 1970년대 지어진 대농단지와 단독주택, 다세대, 다가구, 원룸 등으로 이뤄진 마을로, 뉴타운개발사업이 해제되면서 도심 슬럼화가 가속화되어 빈집 방치와 쓰레기 투척 등 각종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또한 가로등과 방범용 CCTV가 드문 좁고 으슥한 골목길은 우범지대로 변질돼 비행청소년들의 탈선과 흡연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성인 남성들도 해가 저물면 골목 출입을 자제했을 정도.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사업으로 우범지대 개선 ⓒ 강현욱 기자
"셉테드는 구도심, 어둡고 좁은 골목길과 슬럼화된 놀이터, 방치된 공터 및 시선이 차단된 높은 담장 등 취약지역의 디자인을 개선해 범행 기회를 차단하고 지역주민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디자인을 의미한다."
탈선 골목이 봄바람 휘날리는 골목으로
그러나 지난 4월 초 방문한 안양3동은 예전 풍경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산뜻하게 변신해 있었다. 굽이굽이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길은 여전했지만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대신 각기 다른 스토리텔링을 담은 벽화들이 골목 벽면을 화사하게 장식하며 방문객을 반겼다. 마을 한쪽에는 전에 없던 작은 공원도 생겨났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활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안양3동에 화사한 봄바람이 불어 온 것은 구도심 환경을 개선해 범죄를 예방하는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사업’ 이른바,‘셉테드(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 Design)’ 덕분이다. 셉테드는 구도심, 어둡고 좁은 골목길과 슬럼화된 놀이터, 방치된 공터 및 시선이 차단된 높은 담장 등 취약지역의 디자인을 개선해 범행 기회를 차단하고 지역주민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디자인을 의미한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들은 1970년대부터 셉테드를 도입해 실질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포트시는 1973년 주거지 위험도로 진입차단, 일방통행 유도, 보행자 중심의 도로폭 조절 등의 셉테드를 적용해 1년간 강도범죄를 1백83건에서 1백20건으로 감소시켰다. 뉴욕시도 주거단지 진입부 조명개선, 휴게 공간 배치, 뒷마당 관리구역지정, 공용공간 리모델링 등을 내용으로 한 클래슨 포인트 가든 프로젝트(Clason Point Garden)를 추진해 강력범죄를 61.5% 줄였다. 영국은 1989년 셉테드 원리에 기반한 ‘SBD(Secured By Design) 인증제도’를 시행해 인증 지역 내 범죄 및 불안감을 25~50% 감소시켰다.
"올해는 평택시 서정동과 시흥시 정왕동의 다세대 주택, 원룸 밀집지역 등 2개소를 대상으로 셉테드를 적용하기로 했다. 이들 지역에는 투시형 담장 설치로 사각지대를 개선하고 골목길에 비상벨이나 방범용 CCTV를 설치할 예정이다."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사업으로 우범지대 개선 ⓒ 강현욱 기자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시범사업지로 선정
안양3동 일원 6천18㎡가 지난해 2월 경기도의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시범사업지로 선정돼 주민의견 수렴과 설명회 개최, 공공디자인 심의, 실시설계용역 등을 거쳐 9월 공사에 착공한 뒤 12월 사업을 완료했다.
사업은 스쿨존과 범죄예방을 위한 조명 신설, 보도 포장, 배수로 확보, 화단 및 휴게공간 설치, 벽화 그리기, CCTV 설치 등이 중심을 이뤘다. 범죄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담장을 철거하거나 철거가 어려운 경우에는 친근한 느낌의 벽화로 담장을 꾸미기도 했다. 또 빈집 입구 등에 가림막을 설치하고 범죄 사각지대마다 대형 안전거울을 달아 주민 모두가 ‘자연적 감시’에 동참하도록 했다.
골목마다 테마를 달리한 아름다운 벽화 사이로 LED조명을 달아 밤길이 환해진 것도 큰 변화 중 하나이다. 수풀이 우거져 으슥했던 양지소공원은 수목을 제거하고 투명한 담장을 설치해 언제나 환한 햇볕이 드는 양지바른 공원으로 변신시켰다. 늘 주차된 차량들로 혼잡했던 공원 인근에는 귀여운 주사위 볼라드를 설치해 불법주차를 막았다. 상습적으로 쓰레기 무단투기가 이뤄지던 42번길 역시 안양3동 안전지킴이 카페와 트릭아트가 어우러진 아담한 휴식공간이 들어서 포토존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 일부 보도와 차도에 빗물이 스며드는 친환경 특수블록을 깔고 스쿨존을 조성해 어린이들의 안전한 교통환경이 확보됐다. 마을의 변화가 더욱 특별한 것은 단순히 아름답게만 바꾼 것이 아니라 변화에 범죄 예방을 위한 환경디자인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사업에는 도비 2억원과 시비 3억원 등 총 5억원이 투입됐다. 경기도는 지난해 안양과 더불어 고양시 토당동 뉴타운사업 해제구역에서도 셉테드 시범사업을 실시한 바 있다. 특히 주민협의체인 ‘행복단지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설계부터 공사까지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사업으로 우범지대 개선 ⓒ 강현욱 기자
평택, 시흥에 자연적 감시기능 강화한 주거환경 조성
이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올해는 평택시 서정동과 시흥시 정왕동의 다세대 주택, 원룸 밀집지역 등 2개소를 대상으로 셉테드를 적용하기로 했다. 이들 지역에는 투시형 담장 설치로 사각지대를 개선하고 골목길에 비상벨이나 방범용 CCTV를 설치할 예정이다. 또 야간 안전보행로를 조성해 주민들이 야간에도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범죄 우려가 있는 공터 등은 공동텃밭이나 공원 등 주민 커뮤니티 공간으로 조성해 사전에 범죄를 차단할 방침이다.
도는 해당 지역에 각각 도비 2억원을 지원하고 지역별로 주민 및 경찰서 등 관계기관 의견수렴, 환경특성 분석을 통해 기본설계를 마련한 뒤, 9월경 공사를 착공해 올해 말 준공할 예정이다. 특히 올해는 설계단계부터 공사까지 전 과정에 지역주민이 참여하고 도에서 추천한 셉테드 전문가의 자문을 받도록 해 사업의 완성도와 효과를 높일 계획이다.
주명걸 도 건축디자인과장은 “도내 구도심 주택밀집지역 등 취약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범죄예방 환경디자인의 확산을 위해 시범사업을 확대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사업으로 우범지대 개선 ⓒ 강현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