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 작가의 저서 「동대문 외인구단」 표지 ⓒ 사진제공/류미
“불편한 몸으로 몇 년째 싸우고 있는 나. 공부 스트레스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인 아이들. 수많은 부상과 재활의 시간을 지나 은퇴한 박 감독. 그라운드에서 우리는 누구도 타인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그라운드에서 우리는 야구 하나로 뭉친 선수였고, 감독이었다. 한 팀이었다. (…) 헛스윙을 하고, 땅볼도 숱하게 놓치다 마침내 삼진을 잡고, 홈런을 치면서 우리의 상처는 자연스레 아물어갔다.”
ㅡ 본문 중에서
푸르미르 야구단 멘탈코치인 류미 작가가 쓴 <동대문 외인구단>의 한 대목이다.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2013년 5월, 특별한 관심이 필요한 동대문 지역의 중학생들을 위해 푸르미르 야구단을 만들었다. 학교도 다르고, 학년도 다르고, 저마다의 사연도 다른 이 지역 중학생들 23명이 모여‘외인구단’이 탄생한 것이다.
감독에는 박승민 현 넥센 불펜코치가, 아이들과 소통하고 마음을 어루만지는‘멘탈코치’역에는 창녕 국립부곡병원 의사 류미 씨가 나섰다. 그녀는 한 달에 두 번씩 서울과 경남 부곡을 오가며 아이들의 변화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상담자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그 8개월간의 따뜻하고도 놀라운 동고동락을 이 책, <동대문 외인구단> 한 권에 담아냈다.
푸르미르 야구단의 멘탈코치, 류미 작가 ⓒ 사진제공/류미
꿈기자는 지난 6월 6일, 출판사를 통해 알아낸 류미 작가의 이메일로 인터뷰 요청을 했다. 이틀 후 답변이 왔고, 이메일을 통한 그녀와의 따뜻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비록 글로 주고받은 문답이었지만, 멘탈코치다운 류미 작가의 답변들은 눈빛을 주고받은 인터뷰만큼이나 꿈기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가르치지 말고 먼저 듣자
꿈기자(이하 꿈) : 저는 ‘멘탈코치’라는 말을 책에서 처음 봤어요. 멘탈코치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으로 승낙하셨나요?
류미 작가(이하 류) : 처음에는 저도 망설였지요. 차로 다섯 시간이나 가야 하는 먼 거리니까요. 그런데 저는 사실 새로운 것,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에는 어린 친구들을 만나는 것만큼 좋은 자극이 없지요. 물론 야구도 좋아하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는’ 일을 찾자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멘탈코치라는 말은 사실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르친 게 아니라 저도 배우는 과정이었으니까요.
꿈 : 아이들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이렇게 아이들을 대해 주어야겠다’ 라고 특별히 다짐한 것이 있으신가요?
류 : 처음 면접장에서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정말 다양한 친구들이 있구나’였어요. 저와 눈도 맞추지 않는 친구도 있었고, 말을 잘 안하는 친구도 있었죠. 또 어떤 친구들은 자기 특기를 그 자리에서 막 보여 주기도 했거든요. 대부분 어른들만 상대해 왔던 저한테는 어떻게 보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정말 살아있는 듯한’느낌을 주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다짐’이랄 것까지는 없을 테고, 그냥 그런 생각을 했어요.‘절대로 내가 먼저 가르치려 들지 말자, 일단 듣자’라고요.
꿈 : 특별히 청소년들에게 더 마음이 가는 이유가 있을까요?
류 : 청소년들에게 더 마음이 가는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첫째는 제가 청소년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특목고, 입시경쟁 그 자체인 환경에서 지냈거든요. 둘째는 첫 질문에 대한 답변하고도 비슷한데, 청소년들은 참신하기 때문이에요. 굳이 표현하자면 뇌가 말랑말랑하다고나 할까요? 새로운 시각을 주기 때문에 청소년들과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요.
야구로 커 가는 푸르미르 아이들
누구하나 특별하지 않은 아이가 없다. 특히 여구장에서는. 어떤 포지션도 중요하지 않은 포지션이 없다. 투수의 실책을 야수가 막아줘야 하고, 야수의 실책은 그 다음 이닝에서 타자가 점수를 내면서 날려줘야 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모두 내가 필요한 존재구나, 특별하구나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를 사랑하게 된다. 자기를 사랑하게 된 아이는 이제 여유가 생겨서 다른 아이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ㅡ본문 중에서
꿈 :‘문제아’로‘여겨지는’ 학생들을 만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요?
류 : 하하. 우리 기자님이 센스가 있으시군요. 맞아요.‘여겨지는’에 인용부호가 필요하지요. 글쎄요, 딱히 힘들었다는 건 없고요. 다만 안타까웠다고 할까요? 각자의 장점이 많은 친구들인데, 성적이라는 잣대 하나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게 속상했어요. 제가 아무리“너는 장점이 많아”라고 말해도 성적표가 나오면 풀이 죽는 게 현실이니까요. 학생들에 대한 평가가 다방면으로 되면 좋을 텐데… 이런 생각 많이 했어요.
꿈 :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요?
류 : 야구를 하면서 아이들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보니까 저도 좋은 기운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그냥 스탠드에 앉아 있으면서 경기에 뛰려고 하지 않던 친구들이 나중엔 야구팀의 일원이 되어 형들에게 격려받고 하이파이브를 하는 걸 보니까 저도 신기했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역시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커가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꿈 : 학생들과 지내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류 : 넥센 불펜코치인 박승민 감독님께서 운동화 들고 왔을 때가 떠오르네요. 아마 야구시즌이라서 그런 듯해요. 감독님이 무뚝뚝하고, 아이들하고도 별로 말씀이 없는 성격이었는데,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프로선수들 운동화를 몇 개 챙겨 오셨더라고요. 지금도 쟁쟁한 이택근 선수의 운동화도 있었고요. 아이들이 다 서로 신겠다고 하는데, 아~ 남자들의 우정은 이런 거구나…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꿈 : 선생님도 열렬한 야구팬이라고 들었는데요, 실제로 가까이서 프로 야구 선수들을 보니 기분이 어떠셨어요?
류 : 사실 저는 프로 스포츠 선수들을 본 적이 없어서 그 분들에 대해 백지 상태였어요. 주변에서 기자, 사업가, 의사, 법률가 등 다른 직업군은 많이 봤지만요. ‘프로 스포츠 선수’하면 왠지 연예인하고도 좀 비슷한 것 같고 그랬던 게 제 편견이었는데요, 가장 놀랐던 것은 그분들이 정말 성실하다는 거예요.
운동을 하면‘저분들은 그냥 운동천재야. 아무래도 공부하는 사람만큼 성실하고 노력할까’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요, 저의 편견이었어요. 저는 그분들이 늦는 걸 본 적이 없어요. 항상 아이들보다 먼저 오고 아무 말 없이 몸 풀고 시작하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역시 프로는 다르다 생각했지요.
꿈 : 멘탈코치로 일하면서 아이들에게서 느끼고 배운 것은 무엇인가요?
류 : 누구 하나 특별하지 않은 아이가 없다, 역시 그거겠죠. 아무리 모든 것을 다 못하는 것 같은 사람이라도 어느 것 하나는 정말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있다…이런 다양성에 대한 깨달음일 것 같아요.
해서 될까 vs. 해야 한다
청소년기를 유독 힘들게 보냈다는 류미 씨.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지만, 사실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당한 사고로 양쪽 발목을 크게 다쳐 지금도 오래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최대 10분, 걷기도 30분 이상은 할 수 없다. 휠체어를 타고 가까스로 인턴생활을 마쳤고, 현재 경상남도 창녕의 국립부곡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 자퇴, 서울대학교 불문과 졸업, 가톨릭대학교 의대 졸업, 경향신문에 입사해 3년간 편집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꿈 : 선생님도 힘든 시간이 많았잖아요? 그걸 다 이겨내셨고요. 힘들 때마다 선생님을 다시 일으켜 세운 힘은 무엇인가요?
류:‘이겨냈다’고 표현하니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드네요. 사실 저는 어떤 면으로는 ‘극복’의 스토리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거든요. 다만, 단기적으로 ‘이건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 일이 된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짰던 것 같아요. ‘된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짜는 것과 ‘이걸 해서 될까’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짜는 것과는 결과적으로 차이가 나더라고요. 굳이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부여라고나 할까요? 항상 일을 할 때 동기부여를 먼저 찾으려고 애쓰기는 합니다.
’2011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중 1인으로 선정된 류미 작가 ⓒ 사진제공/류미
꿈 : 선생님이 앞으로 이루고 싶으신 꿈은 무엇인가요?
류 : 꿈이라… 사실 전문의를 따기까지는 이런저런 일들이 좀 많아서요, 구체적으로 꿈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어요. 작년에 전문의를 땄고, 이제 올해 좀 여유가 생겼지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리가 나아서 아프지 않고 뛰어보는 게 꿈이에요. 유명한 시각장애인 가수 스티비 원더가 그랬지요. 돈과 명예를 거머쥔 어마어마한 슈퍼스타인데요, “내 꿈은 우리 딸 얼굴을 보는 거예요” 라고요. 몸이 아픈 사람들은 사실 이런 바람이 다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의 꿈은요,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요. 음, 재미있는 추리소설도 한 번 써 보고 싶고, 괜찮은 학교 같은 공간도 한 번 꾸려 보고 싶어요. 또, 가벼운 토크쇼 같은 것도 해 보고 싶고요.
꿈 : 제 주변에도 친구관계나 성적, 부모님과의 갈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든 친구들이 많아요. 그런 친구들을 위해 응원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류 : 먼저‘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내 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 편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죠. 그런 사람이 없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정말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눈을 떠 보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어딘가 한 사람은 있다’고 여러분도 생각해 주세요. 파이팅입니다.
항상 옆을 지켜주는 강아지들과 함께한 류미 작가 ⓒ 사진제공/류미
그녀 스스로는 그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해 온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고난이고, 고비였을 힘든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러 가지로 불리한 경기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멋지게 승리했다. 자신이 필요한 곳에서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여전히 근사한 꿈을 꾸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왠지 모르지만, 꿈기자는 그녀의 추리소설을 꼭 읽게 될 거란 예감이 든다.
동대문 외인구단의 멘탈코치로 학생들의 ‘편’이 되어 ‘먼저 들어준’ 류미. 그녀의 코치를 받은 동대문 외인구단 야구부원들도 필요한 사람,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자신을 사랑하고,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마음의 여유도 생기지 않았을까?
보란 듯이 세상을 향해 던진 돌직구와 겁 없이 휘두른 풀스윙, 어쩌면 그녀와 동대문 외인구단의 도전은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