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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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 ‘님의 침묵’
(2009년 수능 기출문제 1~6번 中) |
대한민국의 고교과정을 이수했다면 누구나 아는 시일 것이다. 행여 교과서를 통해 보지 못했더라도 어디선가 한번쯤은 읽거나 들어본 시의 구절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작가가 애타게 외치던 님은 누구일까? ①애인 ②민족 ③조국 ④불도 ⑤절대자 중 답은 너무도 간단하다. ‘모른다’가 정답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말해준 적이 없다. 그저 님에 대한 나름의 추측에 따라 시의 해석이 달라질 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시를 읽으며 화자의 애타는 마음이 가슴으로 느껴졌던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더욱이 어린 학생들로서는 그저 밑줄을 그어가며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답을 내려야하는 ‘무의미’한 하나의 글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교과서 속 생면부지의 작가는 본의 아니게 심술쟁이가 되곤 했다. 작가를 모르고, 그의 진심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면 속 이야기들은 이를 마주해야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유의미한 ‘감동’이나 ‘의미’가 되기는 어려웠다.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TV에 한번이라도 더 노출된 유명작가나 SNS 상의 유명인, 혹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은 쉽게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그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무명작가, 무명인들에 비해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가를 안다는 것은 예비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만든다. 하지만 자서전이나 수기를 넘어선 ‘문학’은 여전히 대중에게는 조금은 먼 그들만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길을 결심하게 된 초등학교 시절을 이야기하는 정란희 작가. ⓒ 이조 기자
이러한 문학과 대중 간 괴리의 축소를 경기도의 ‘독서문화프로그램 지원 사업’이 이끌어 왔다. 독서문화프로그램 지원 사업은 시설이나 장서 수가 작은 소규모 ‘작은도서관’들이 각자의 자생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이다. 현재 경기도에는 공립 257개, 사립 1057개 등 총 1314개의 작은도서관들이 접근성과 편의성을 기반으로 지역주민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경기도는 2011년부터 연간 2회에 걸쳐 각각 30~40여 곳을 선정, 특성에 맞는 독서문화프로그램을 발굴하고 이들의 운영을 지원해왔다.
한 어린이가 미리 준비한 질문을 읽고 있다. ⓒ 이조 기자
경기도 화성시 동탄 예당마을 롯데캐슬작은도서관은 2015년 하반기 공모에 선정되어 운영비를 지원받아 어린이들을 위한 자체적인 독서문화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개최할 수 있었다. 지난 7월 11일 열린 행사를 위해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운영위원들은 선착순으로 50명의 신청자를 받았다. 하지만 행사 당일, 당초 계획했던 50명의 신청자 외에도 소식을 듣고 작가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다수의 어린이들로 작은도서관은 만원을 이뤘다. 이에 롯데캐슬작은도서관 측은 급히 의자를 공수해 오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이날 어린이들을 만난 정란희(한국작가회의 어린이·청소년문학분과장) 작가는 △단추마녀의 수상한 식당 △나쁜 말은 재밌어 △슈퍼보이가 되는 법 등 각각의 작품마다 제목을 선정하게 된 계기, 책을 썼던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자신이 읽었던 책의 작가를 눈앞에 마주한 어린이들은 마치 TV 속 아이돌 가수라도 본 것처럼 손을 꼭 잡고 함께 왔던 엄마조차 까맣게 잊은 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작가 또한 중간 중간 질문을 통해 답변을 유도하는 등 한 시간 반에 걸친 시간동안 다양한 내용으로 진행을 이어갔다. 이외에도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설명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뤄졌다.
이 날 작가는 아이들에게 동화책 밖을 걸어 나온, 살아있는 주인공이었다. ⓒ 이조 기자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 오랜 시간 참아왔던 어린이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책을 쓸 때 그림(삽화) 그려주는 사람은 어떻게 뽑았나요?” 최보윤(예당초·11)
“나쁜 말을 쓰면 정말 구린내가 나나요?” 이서진(7)
어린이들은 각자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나중에 작가가 되고 싶은데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생기나요?”라는 어린이 독자의 질문에 정란희 작가는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이다. 마음을 담아 쓴다면 반성문도 작품이 된다. 여러분도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며 따뜻한 응원을 건넸다.
정란희 작가의 사인이 담긴 책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김지연(예당초·11) 양은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고, 미리 책을 읽고 왔더니 설명이 더 재미있었다. 작가 선생님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며 “정란희 선생님이 옆집 아주머니처럼 느껴졌다. 작가라는 직업의 사람들이 더 이상 어려운 사람 같지 않다”고 소감을 전했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미처 가시지 않은 설렘에 콩콩거리며 인터뷰에 응했던 김 양은 이날의 만남을 통해 제 2의 박경리, 박완서 같은 작가를 꿈꾸게 됐다.
한편 행사에 초청된 정란희 작가는 “아이들에게 성과 위주의 공교육 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경험의 시간이 됐길 바란다”며 “이러한 행사를 통해 어린 독자들이 자발적, 능동적으로 책을 읽게 됨으로써 독서와 문학에 대한 자세와 이해의 출발점이 달라지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고 말했다.
어린이들이 정란희 작가에게 쓴 편지들. 이웃 아주머니를 대하듯 편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 이조 기자
현대사회 그리고 학교는 우리들에게 책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책읽기를 종용할 뿐, 책이 왜 재미있는지, 왜 책 속의 이야기들이 나와 먼 이야기가 아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행사를 통해 어린이들은 문학이 사실은 가까운 이들의 ‘유의미’한 이야기였음을 깨닫고 그것을 가슴으로 읽으려는 시도가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칼을 든 손이 식재료를 만나면 요리사가 되고, 흙을 만나면 조각가가 되고, 예(禮)를 만나면 펜싱이 된다. 하지만 칼을 잡아보지 않은 사람은 요리사도 조각가도 펜싱선수도 될 수 없다. 이처럼 어린 날의 경험이 생각을 확장시키고, 생각의 확장은 곧 미래를 확장시킨다. 우리네 삶의 확장에 경기도가 문학으로서 앞장서고 있음에 가슴 벅찬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