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경기도박물관은 8‧15 광복절을 맞이하여 광복과 독립운동가의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특별전 ‘어느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7월 25일부터 10월 25일까지 전시하고 있다.
광복 7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경기도박물관 ⓒ 이예은 기자
이 전시에서는 파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찬익의 손녀가 기증한 자료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박찬익, 임시정부 재무부차장이었던 신건식과 그의 부인인 오건해 그리고 자녀인 광복군 부부 박영준과 신순호의 독립운동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박찬익(1884~1949)
박찬익은 1884년 1월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살 무렵 서울의 친척집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신식문물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공학교에 들어갔으나 일본인 교사와의 충돌과 반항으로 퇴학을 당했다.
1905년 비밀조직 신민회에 들어갔으며 근대 기술과 지식을 배우기 위해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였고 국권회복을 위해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를 받아들였다. 나라가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박찬익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하였고 1918년 만주와 노령 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인 신규식, 신채호, 안채호 등과 대한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는 또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을 맡았으며 광복군 창설 시 중국 정부와의 교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45년 8‧15광복이 되자 ‘주화대표단’의 단장으로 중국 내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다가 1948년 귀국하였다.
박찬익 관련 자료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와 임시정부 요인, 윤봉길 의거 때 폭탄을 제조해 준 중국인 왕백수 등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청사 사진은 아랫부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청’이라는 설명과 ‘대한민국 원년 10월 11일 재중화민국 상해 법계하비로 321호’가 적혀 있어 시기와 주소까지 알 수 있는 유일본이다.
사진 자료 외에 한일강제병합 공고문, 신민회 사건 공판 판결문, 신규식과 박찬익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 도장, ‘동제사’ 창립 취지문, 대한독립선언서 등이 전시되어 생생한 독립운동 자료를 볼 수 있다.
박찬익이 김구, 왕백수 부부와 함께 한 사진(왼쪽)과 임시정부 요원들 사진(오른쪽) ⓒ 이예은 기자
대한독립선언서(왼쪽)와 한일강제병합 공고문(오른쪽) ⓒ 이예은 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사진(왼쪽)과 신민회 사건 공판 판결문(오른쪽) ⓒ 이예은 기자
◈ 한국광복군 박영준(1915~2000)
박영준은 1915년 용정에서 태어나 잦은 이사와 피난으로 궁핍하게 살았다. 17살이 될 무렵 아버지를 찾아 나서 1년 만에 만났다. 1939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들어갔다가 조국 독립을 위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중국의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광복군에 들어갔는데 임시정부 재무부에서도 일을 하였다. 1945년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을 맡아 일본군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광복 후에는 주화대표단에서 일을 하다가 1948년 아버지 박찬익과 귀국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다.
박영준 관련 자료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명장, 대한민국임시정부 배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배지, 광복군 훈련 기록,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졸업 사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임시정부 임명장(왼쪽), 광복군 서명 태극기(오른쪽) ⓒ 이예은 기자
광복군 여군복과 광복군 전투복(왼쪽), 한국광복군 배지(오른쪽 위), 광복군 훈련기록(아래) ⓒ 이예은 기자
◈ 한국광복군 신순호(1922~2009)와 가족들
신규식(1879~1922)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가 약물중독으로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는데 이때 호를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으로 지었다고 한다. 경술국치 뒤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하였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법무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21년 국무총리대리 겸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22년 과로와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신건식(1889~1955)은 신규식의 동생이며 신순호의 아버지이다. 1912년 동제사에 가입하였고 1921년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정보수집과 군자금을 모집한 뒤 돌아가다 일본 경찰에 잡혔다. 그러나 1922년 상해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943년 3월 임시정부 재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신규식의 시집 ‘아목루’(왼쪽)과 신규식의 저술 ‘한국혼’(가운데), 신규식 등이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소집을 제의·제창한 ‘대동단결선언’(오른쪽) ⓒ 이예은 기자
오건해(1894~1955)는 신순호의 어머니로 몸이 약했지만 음식 솜씨가 좋아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음식을 먹어 보았을 정도였다. 1938년부터 1945년 귀국까지 김구 선생의 식사를 챙기기도 하였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에 참여했다.
신건식과 오건해는 1943년 중국 중경 오사야항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의 결혼증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것으로, 희귀한 자료이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이들의 결혼예복, 중국에서 사용하던 생활용품 등을 만나 볼 수 있다.
신건식과 오정해의 결혼증서(왼쪽)와 결혼식 때 입은 치파오(오른쪽) ⓒ 이예은 기자
전시장에는 가족과 함께 온 관람객들이 많았는데 김현준(수원시 권선동) 씨는 “아이들이 방학이라서 왔는데 광복을 즈음하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전시라 의미 있었습니다. 광복군이 서명한 태극기를 보니 독립을 위해 애 쓰신 분들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습니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학교의 추천으로 전시장을 찾았다는 곽채령(남양주시) 씨는 “한 가족이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활동을 하고 몸을 바쳤다는 게 대단합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도 그분들만큼 나라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고 하였다. 또 김형진(계원예중 2학년) 군은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마지막 코너의 만화는 일제강점기 그분들의 활동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 같아 뭉클했습니다.”라는 전시 소감을 전했다.
한편, 이번 전시는 오는 10월 25일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