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시전 ‘어느 독립운동가 이야기’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왕 히로히토가 라디오를 통해 패배를 시인함으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은 끝나게 되었다. 거리마다 환희와 기쁨이 넘쳤던 광복의 날. 그 뒤에는 희생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했던 이들의 눈물과 땀이 숨어 있었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일 수교 50주년이기도 한 2015년 8‧15 광복절을 맞이하는 감회는 어느 해보다 각별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35년이란 긴 시간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들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여기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며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전시회가 있다.
경기도박물관에서 열리는 ‘어느 독립 운동가 이야기’는 파주 출신 독립운동가 집안의 삶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립 이야기를 들려준다. 2대에 걸친 가족의 이야기는 이들의 후손이 경기도박물관에 독립운동 자료 2,000여 점을 기증하면서 전시로 이어지게 되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가계도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독립군 집안의 가계도. 박찬익의 손녀이자 유물기증자인 박천민(60세)의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등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음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제1부 ‘나의 할아버지 박찬익’, 제2부 ‘나의 아버지 박영준’, 제3부 ‘나의 어머니 신순호’로 구성되어 있다. 박천민의 회상과 설명에 따라 이들 독립운동가 집안의 삶을 차례로 따라가 보자.
제1부 ‘나의 할아버지 박찬익 이야기’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태어난 박찬익은 1905년, 일본에 외교권을 뺏긴 을사늑약 체결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에 입단했다. 하지만 1910년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대거 체포하기 위해 사건을 거짓으로 꾸미고 확대시켜 고문을 한다. 이후 신민회는 해체되고, 박찬익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게 되고, 박찬익은 만주에서 신규식 선생의 독립운동단체 ‘동제사’에 참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이 박찬익, 앞줄 가운데가 백범 김구)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1921년 7월, 박찬익은 1919년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업무를 담당했다. 또 그해 11월 신규식이 중국 호법정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외교공세를 펼 때, 박찬익이 부사로 활동해 임시정부 승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탁월한 중국어 능력과 남다른 포용력을 가지고 있던 박찬익은 중국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중국 국민당과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나갔다. 광복군 지원문제로 벽에 부딪혔을 때 중국 요인들을 만나 광복군에 대한 전적인 지원을 받아낸 것도 박찬익이었다. 백범 김구, 신채호, 윤봉길 등의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그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시정부 안에서의 박찬익 역할은 매우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이후 대부분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박찬익은 끝까지 중국에 남아 중국 내 동포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주화대표단’의 단장으로 활약했다. 1948년 그는 37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향땅을 밟게 되지만, 돌아온 지 7개월 만인 이듬해 3월 병으로 세상을 뜬다. 다음은 박찬익이 남긴 유서의 일부분이다.
나는 평생을 두고 내가 한 일을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고 또한 알아주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난 감투를 쓰고 싶다거나 출세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가져보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무엇이든지 할 뿐이다.
나는 기둥이나 대들보라기보다 남의 눈에 띄지 않지만 또한 없으면 제대로 서기 어려운 주춧돌이 되고 싶었다. 내 나라,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인데 그걸 누구에게 알리겠느냐, 또한 알아주기 바라겠느냐.
주춧돌이 되겠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그러니 내가 죽거든 요란스럽게 떠들지 말고 조용히 아버님이 계신 망우리에 묻어 주려무나…
-박찬익의 유서 中-
제2부 ‘나의 아버지 박영준 이야기’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제2부 ‘나의 아버지 박영준’은 광복군 활동 등 3개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독립운동가로 중국에 가 있던 아버지 박찬익의 얼굴도 모른 채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영준은 중국의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제17기로 졸업했다. 박영준은 중국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가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 한국광복구 등 항일독립투쟁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젊은 시절의 박영준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1945년 3월 제3지대 제1구재 대장으로서 새로운 훈련 교재를 만들고, 청년들을 훈련시키며 일본군과 싸울 계획을 세우고 있던 박영준. 아침 훈련을 진행하고 있던 1945년 8월 15일, 광복 소식을 들었다. 힘겹게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던 박영준과 광복군 동지들은 조국의 땅도 밟지 못하고 허망하게 맞이한 독립에 모두 주저앉아 통곡했다. 박영준은 광복 후에는 주화대표단의 일을 돕다가 1977년 대한민국 국군으로도 활약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기도 했다.
제3부 ‘나의 어머니 신순호 이야기’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제3부 ‘나의 어머니 신순호’에서는 박영준의 부인 신순호의 독립운동 이야기가 그려진다. 신순호 역시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1940년 창립된 한국광복군에 대한민국 여군으로 입대해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나라를 되찾겠다는 열망 하나로 남녀노소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왼쪽부터 오건해, 신순호, 신건식 순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박영준이 17세 때 아버지를 찾아 중국 상하이로 건너와 신순호의 집에 머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신순호의 과거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한데 모여 살았기 때문에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고 한다. 1943년 12월 12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당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한인 동포들로 가득 메워졌다. 김구 선생이 주례를 맡은 두 사람의 결혼식은 당시 각 당 대표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이외에도 임시정부의 터전을 마련했던 신순호의 큰아버지 신규식,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이었던 신건식·오건해 부부의 이야기도 함께 소개된다.
책에서만 봤던 광복과 독립이야기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일러스트와 여러 가지 실물들도 함께 전시됐다.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보는 포토존과 동제사 도장 찍어보기 등 어린이들이 즐길 만한 체험 공간도 마련돼 있다.
전시장 바깥에 마련된 임시정부 사진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2대에 걸친 ‘어느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우리 민족의 아픔과 광복의 기쁨, 그리고 그 뒤로 잊혀져 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눈물이 보였다.
광복 70주년, 아무런 대가도 바람도 없이 역사 속으로 기꺼이 ‘나’와 ‘가족’을 던졌던 그들을 기억해 보길 바란다. 전시는 오는 10월 25일까지 경기도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계속된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결의를 다진 ‘광복군 서명 태극기’ ⓒ 김도현/꿈나무기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