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상 속에는 언제나 소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음악도 존재한다. 길을 걸을 때 이어폰을 통해 듣는 음악, 옆에서 흥얼대는 사람의 목소리, 차도를 지나치는 차들의 경적 소리, 옆집의 개가 짖는 소리 등이 모두 예술이라면 믿을 것인가? 옆집의 개가 짖는 소리, 아기가 우는 소리, 또는 아무 소리도 없는 무음 상태. 예술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저런 소리들을 예술로 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백남준이다. 기자는 지난 12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위치한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그의 생을 더 깊게 느껴보기로 했다.
백남준아트센터 건물은 P자 모양으로 되어있다. 혹자는 백남준의 이니셜 PNJ의 P를 따서 그렇게 지은 것이라고 하고, 혹자는 그랜드 피아노 모양을 표현한 거라고 말한다. 건물 모양에도 의미를 담은 백남준아트센터에 들어서면,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약 40분간 조형물들을 관람하게 되는데, 짧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기색 없이 눈을 빛내며 설명을 듣는 관람객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1층에는 상설 전시물들이 있었다. ‘TV 정원’ 이라는 작품은 정글처럼 나무와 풀들이 우거져 있는 정원의 곳곳에 TV를 배치한 작품이다. TV는 ‘바보상자’라고 불리며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나쁜 이미지로 존재했다. 하지만 백남준은 TV를 꽃처럼 봐주길 원했기에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원 주변으로 동그랗게 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또한 백남준이 의도한 것이다. 백남준은 전시물을 한 방향에서 보는 게 아니라, 여러 관점에서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둥글게 길을 냈다고 한다.
백남준의 작품, 머리를 위한 선. ⓒ 정아람 기자
위 작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 그림을 처음 본 어떤 사람은 조선시대의 그림처럼 가지를 그린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백남준이 미디어를 사랑했기에 긴 선을 사용하여 미디어가 길게, 더 길게 사용되고 발전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말했다. 사실, 이 작품은 머리카락과 넥타이에 먹을 묻혀 그린 작품이다. 다른 사람이 상상하지도 못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던 백남준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로봇 K-456. ⓒ 정아람 기자
1층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로봇, `K-456`이다. K-456은 전형적인 로봇의 모습이지만, 입을 움직여 존 케네디의 연설을 말하고, 엉덩이에서는 콩을 배출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이런 로봇의 모습을 통해 로봇과 인간이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하며 인간과 로봇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로봇이 존 케네디의 연설을 하게 한 이유는, 존 케네디가 당시에 미디어를 가장 잘 활용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백남준은 로봇이 사람과 같으므로, 죽음도 피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교통사고라는 상황을 연출하여 로봇을 죽게 만든다. 지금 전시되어 있는 로봇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K-456은 아니지만,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 백남준이 친구처럼 여겼기에, 로봇 K-456을 기억하고 싶어서 같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2층에는 또 다른 전시물들이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남준아트센터 국제 예술상이 2009년부터 끊임없는 실험과 혁신적인 작품으로 미술계에 큰 영향을 주는 예술가를 발굴하기 위해 제정되었는데, 이 상은 백남준의 정신을 이어받은 예술가와 이론가에게 수여되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2년에 한 번씩 수상자의 개인전을 여는데, 이번 개인전의 주인공은 ‘하룬 미르자’이다.
미르자는 사운드와 빛의 파장 전자파의 상호작용과 마찰을 실험하는 설치 작업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미르자는 백남준의 정신을 이어받아, 소음과 사운드 그리고 음악 사이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미르자는 스스로를 ‘비가시적이고 변덕스러운 현상인 전자파를 조작하고, 이를 악보나 악기처럼 다루며 복합적인 설치 작품을 만드는 작곡가’라고 규정한다. 이런 미르자의 국내 첫 개인전 <하룬 미르자 : 회로와 시퀀스>는 전자파를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전자 회로와 이를 끊임없이 점멸하도록 조작하는 프로그램 시퀀스에 주목한다. 이 회로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수히 반복되고 증식하며 전자적 사운드와 빛의 다양한 레이어로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한편, 시각과 청각을 융합하는 전자기적 공명을 연출한다.
하룬 미르자의 국내 첫 개인전, 회로와 시퀀스의 입구. ⓒ 정아람 기자
하룬 미르자가 2013년부터 작업해오고 있는 시리즈, `LED 회로구성`은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을 사용함으로 생명 없는 추상적인 물건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으로 생각되어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버려진 유리창이나 아크릴과 같은 재료를 판으로 사용하고, 여기에 LED 끈이나 와이어, 테이프 등이 그대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래픽적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기도 한 이 시리즈는 LED 불빛이 갖는 순수한 빛이 감성적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하룬 미르자의 작품, LED 회로 구성. ⓒ 정아람 기자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주택, 프랑스 빌라 사보아 전시를 계기로 제작된 이 작품은 태양광 패널을 수직과 수평으로 구성하고 여기에 얇은 LED와 스피커를 설치한 작품이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뒷동산이 가장 잘 보이는 공간에 설치되어, 시간대별로 변하는 태양 에너지의 양에 따라 사운드가 결정된다. 이렇게 태양빛이 전기로 변하고, 그 전기가 사운드로 변하는 유기적이고도 혼란스러운 과정 속에서 관람자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태양의 교향곡을 감상하게 된다. 해설사가 있는 오후 2시에 방문한 관람객들은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소리를 들으며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룬 미르자의 작품 ‘태양 교향곡 태양_코르브 D’ ⓒ 정아람 기자
전시된 하룬 미르자의 작품들 중 마지막에 보게 된 작품은 바로 ‘아담, 이브. 다른 것들 그리고 UFO’였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큰 기계 소리에 놀란 관람객들에게 해설자는 “작품에서 나는 소리니까 걱정 말라”고 하며 해설을 시작했었는데, 그 소리의 진원은 바로 이 작품이었다. 한 번에 4명이 들어가서 관람할 수 있는 이 작품.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자마자 큰 소리가 나서 저절로 주위를 살피는 관람객들의 모습에 해설사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설치에 사용된 스피커와 회로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작품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가운데 위치한 UFO 회로에서 8개의 LED 불빛이 연결되어 방사상으로 뻗어 나간다. 각각의 불빛이 반짝이는 순간에 흐르는 전류가 각각의 스피커에서 다른 소리를 만들어낸다. 이 소리는 작가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작곡한 미니멀한 전자 음악의 형태를 띤다. 방음벽을 구성하고 있는 짙은 회색 발포체와 카펫이 마치 녹음실 스튜디오처럼 소리를 중앙으로 집중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빛과 소리로 가득한 공간 속에 관람객들과 함께 담겨있기 때문에 더 몰입하고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하룬 미르자의 작품, 아담, 이브. 다른 것들 그리고 UFO. ⓒ 정아람 기자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전시물들이 눈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꿈다락 토요 문화학교 등의 활동을 통해 백남준의 정신을 알 수 있는 활동들도 마련하고 있다. 이번 토요 문화학교는 10월 24일부터 매주 토요일 10시부터 13시까지 진행된다. 앞으로 남은 것은 4, 5, 6차로 11월 14, 21, 28일에 예정돼 있다. 소리를 인식하고 나만의 소리 악보 그리기, 소리로 이미지 그리기 등의 활동을 통해 내 생각을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
백남준아트센터의 관람료는 성인 4000원, 학생 2000원이다. 20인 이상의 단체는 50%를, 경기도민은 25%를 할인해 주어 더 저렴하게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이고, 관람 종료 1시간 전인 오후 5시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주말에 방문하여 토요 문화학교도 즐기고, 백남준의 작품들도 보는 힐링 타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