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미술관, 너 거기 있었니?
<기획 2> 이영미술관
이영미술관 전경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사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점ㆍ선ㆍ면ㆍ색채로만 표현하는 그림, 바로 추상화에 대한 정의이다. 추상화를 볼 때마다 알 듯 모를 듯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 한국 추상화의 1세대인 전혁림 화백의 작품들을 감상한다면, 추상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피카소,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전혁림 화백,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영미술관에서 열린 ‘백년의 꿈’ 전시회에 꿈기자가 다녀왔다.
‘전혁림, 백년의 꿈’ 전시관 입구에서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미술관 너 거기 있었니?’ 기획 연재 두 번째 편으로 소개할 ‘이영미술관’은 2001년 6월 용인 기흥구에 문을 연 미술관으로, 경기도 내 개인미술관으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김이환 미술관장과 아내 신영숙 씨는 그저 그림이 좋아 미술관을 열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미술관의 이름도 부부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따서 이영.
부부는 채색 동양화가이자 김 관장의 고교 선배인 박생광 화백(1904∼1985) 의 그림을 사면서 컬렉터로 발을 디뎠다. 그러던 중 TV에서 본 전혁림 화백의 그림에 마음이 끌렸고, 그때부터 전 화백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이영미술관은 두 화백의 그림을 뼈대로 하고 있다.
‘전혁림, 백년의 꿈’ 전시회 포스터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이영미술관에서는 전혁림 화백 탄생 100주년을 맞아 특별한 전시를 마련했다. 바로 전혁림 화백의 추상화와 회화작품 등을 한자리에 모은 ‘전혁림, 백년의 꿈’. 1, 2, 3층 전관에 전혁림 화백의 작품 300점을 선보이고 있으며, 특히 그동안 미공개된 작품과 생전의 전 화백과 인연이 깊은 시인들이 그에게 헌정한 화시전이 눈길을 끈다.
전시관 1층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1916년 1월 21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난 전혁림은 1949년 제1회 국전에 입선하고, 200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 또한 2005년 90세의 나이에 ‘90, 아직은 젊다’신작전(展)을 개최하는 등 말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90세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화가는 드물다. 꿈기자는 노령의 떨리는 손으로 화폭에 그림을 채워나갔을 전혁림 화백의 모습을 상상하며, 진정한 예술가에게 나이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전혁림 화백은 지난 2010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이곳 이영미술관에 고스란히 남았다. 이영미술관은 전혁림 작품의 국내 최대 소장처이기도 하다. 전혁림은 한번도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오방색과 코발트블루, 굵은 그림 선이 그가 그린 그림의 특징이다. 알록달록 민화처럼 정감있게 그려진 작품들은 아이들에게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전혁림 화백의 트레이드마크인 코발트블루 색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전 화백의 그림 속에서 그의 고향인 통영의 항구 풍경은 평화롭다. 통영항 시리즈는 2005년 이영미술관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이 반해서 구입한 뒤 청와대에 걸어놓았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통영을 여행한 적이 있는 꿈기자의 눈에도 전 화백의 그림은 통영 앞바다의 비릿한 냄새와 함께 하루하루 힘차게 살아가는 바닷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빼놓을 수 없는 전혁림 화백의 대표작은 목기에 그린 추상화다. 1050개나 되는 목기에 전부 다 다른 색깔과 무늬의 추상화를 그려 넣은 ‘만다라’가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전통적이면서도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독특한 문양과 그 규모가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아내인 신영숙 씨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목기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같은 크기 목기를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신영숙 씨는 그렇게 목기를 살 때마다 그걸 들고 주말이면 통영으로 달려가 그림을 그려 받았다고 한다. 평범한 나무 그릇들이 전혁림 화백의 손을 거치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추상화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1050개의 목기로 이루어진 ‘만다라’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2층으로 올라가면 화가의 그림을 주제 삼은 화시전(畵詩展)이 눈 앞에 펼쳐진다. 전 화백은 생전에 “내 그림 속에는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이영도 시인의 시상이 들어 있다”고 말했을 정도로 시인들과의 관계가 깊었다. 문태준, 신달자, 오세영, 정현종 씨 등 시인 36명이 자필로 쓴 시가 그림과 나란히 걸려 있다. 대부분 예술적 영감이 흘러 넘쳤던 전혁림 화백의 삶을 추억하는 시다.
시 ‘꽃 터지는’과 함께 걸린 전 화백의 그림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이영미술관에는 메인 전시관 외에도 관람객들을 예술의 시간으로 이끄는 아기자기한 공간들이 많다. 관람객들을 전시관에서 나와 조금만 걸어가면 이영미술관 내에 있는 신영숙컬렉션 박물관도 관람할 수 있다. 전혁림 화백의 미공개 작품을 포함해 총 170여 점의 목기·도자회화를 볼 수 있다.
신영숙컬렉션 박물관 내부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전혁림 화백이 직접 그림을 그린 가구들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또한 이영미술관은 14년이나 된 만큼 예쁘게 가꿔진 조각공원으로도 유명하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정원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족끼리 잔디밭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미술관 내에 있는 카페 겸 도서관은 편안하게 차를 마시며 미술 관련 책을 뒤적여 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이영미술관 조각공원 ⓒ 김도현/꿈나무기자단
전혁림 화백의 작품들을 돌아보고 나니 꿈기자가 평소 추상화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조금은 바뀌었다. 추상화는 그저 사물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 관람객들에게 전해지는 감동은 똑같다. 오히려 관람객들에게 상상의 자유를 준다는 점에서 추상화는 훨씬 더 열려 있는 예술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전혁림 화백의 그림이 간결한 선과 강렬한 색채감만으로 통영 앞바다의 바닷바람을 전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꿈기자의 집에서 차로 겨우 10여 분 거리에 있는 이영미술관. 자주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이렇게 의미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줄 몰랐다. 취재를 위해 찾아가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은 추운 겨울에는 마음까지 훈훈해지는 미술관이 어떨까. 지금 가까운 미술관에서 뜻밖의 ‘좋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백년의 꿈’ 전시는 오는 12월 31일까지 계속된다.
* 이영미술관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6시 / 매주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