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한 남한강의 물결을 곁에 두고 낮고 부드러운 봉미산 기슭에 자리잡은 신륵사는 여주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 신륵사 제공
여주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고려시대 말기에 당시 왕사였던 나옹선사 혜근이 잠시 머물던 중 입적한 사찰로 유명하다.
신륵사는 고려말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고 당시의 유물들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조사당과 다층석탑, 전탑, 석등, 석종과 문화재급 법전 다수를 보존하고 있다.
■ 여주팔경의 첫 번째 ‘신륵사’…수승한 경관과 오랜 역사 간직
유유한 남한강의 물결을 곁에 두고 낮고 부드러운 봉미산 기슭에 자리잡은 신륵사는 여주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봉미산 우거진 숲을 뒤로 한 채 곁으로는 가파른 절벽이, 앞으로는 여강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흘러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덕분에 고려 시대 대학자인 목은 이색과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 등 이름난 시인들이 남긴 시가 많다.
조선후기 문인 김병익의 <신륵사중수기>에서는 신륵사와 여주의 뛰어난 경관이 전국에 알려진지 천년이나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여주와 신륵사의 아름다움은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가지를 들어 여주팔경으로 일컬으며, 그 첫 번째가 바로 신륵사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인 것을 보면 여주에서도 신륵사는 수승한 경관과 오랜 역사로 인하여 여주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온 곳임을 알 수 있다.
여주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고려시대 말기에 당시 왕사였던 나옹선사 혜근이 잠시 머물던 중 입적한 사찰로 유명하다. ⓒ 신륵사 제공
■ 세종대왕 영릉의 원찰 역할을 한 사찰
신륵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까이 있는 세종대왕 영릉이다. 세종대왕은 유교 국가 조선의 제4대왕이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불교에 의지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 때문에 잠시 신륵사가 고난을 겪기도 했지만 세종대왕의 영릉이 옮겨오면서 다시 이름을 떨쳤다.
조선 예종시대(1469년)에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이 여주로 이장됐다. 세종대왕의 불심을 헤아려서인지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영릉을 보호하기 위한 원찰로 삼고 보은사로 이름을 바꿔 불렀다.
신륵사가 세종대왕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자, 영릉에서 제향이 있을 때 제사 음식을 담당하기 위한 사찰의 역할을 한 셈이다.
이를 통해 조선이 불교를 배척한 성리학 중심의 유교 국가였지만, 조선 왕실 내부에서는 불교에 대한 신앙이 전해내려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 국가지정문화재 8점, 도지정 문화재 7점 등 보물급 유물 간직
역사가 깊은 절인 신륵사는 주변 경치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보물급 유물(국가지정문화재 8점, 도지정 문화재 7점)을 간직하고 있다.
신륵사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무학대사의 스승이자 고려시대 스타급 큰스님이었던 나옹선사가 이곳에 입적한 뒤부터이다.
신륵사의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보물 제180호)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세 사람은 서로 간에 관계가 돈독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 말 기울어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
<보제존자진당시병서>에 의하면 고려 우왕5년(1397)에 진영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신륵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조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지공, 그리고 좌우에 무학과 나옹스님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중앙 지공화상의 영정 앞에는 목조로 된 나옹스님의 독존(獨尊)을 안치했다.
역사가 깊은 절인 신륵사는 주변 경치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보물급 유물(국가지정문화재 8점, 도지정 문화재 7점)을 간직하고 있다. ⓒ 신륵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