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消防)은 소방관서에서 일상적으로 하는 업무로 화재를 예방‧경계하거나 진압하고, 그 밖의 소방활동인 재난과 재해, 위급한 상황에서의 구조‧구급활동 등을 통해 국민의 생명과 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는 등의 활동을 일컫는 말입니다.
가장 긴급한 순간, 가장 도움이 필요로 하는 그 순간에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고 피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대응하는 그 현장을 떠올려보면 멀리서부터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오는 소방차와 그 차에서 다급히 달려내려오는 소방관들의 모습부터 그려지죠.
다사다난했던 2024년 갑진년. 올해도 경기소방은 경기도민의 안전한 삶을 위해 밤낮으로 노력을 해왔습니다.
이에 경기뉴스광장이 올해 경기소방을 빛낸 인물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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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의 2024년 ‘명예로운 보훈가족’으로 선정된 경기도 부천소방서 중앙119안전센터 공병삼 소방위. ⓒ 경기뉴스광장 김지호
“나에게 소방은 ‘운명’입니다!”
공병삼 부천소방서(중앙119안전센터) 소방위의 이야기입니다.
공병삼 소방위는 “소방은 언제나 제 삶의 한 부분이었다”이라며 “아버지가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셨다. 집 앞이 소방서였는데, 예전에는 (자가용) 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소방공무원은) 소방서 주변에 많이들 살았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공병삼 소방위는 이어 “아버지가 부천소방서에서 근무하셨다. 집 앞에 나오면 소방서 앞에서 친구들하고 놀았다. 하굣길에 소방서에 들르고, 제일 큰 (소방)차가 아버지가 담당하는 차였다”라며 “손뼘으로 그 소방차를 재면서 놀았고, 옛날의 (소방공무원) 원로들을 지금 만난다. 다 아시는 분들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5일 공병삼 소방위를 만나기 위해 부천소방서로 향했습니다.
공병삼 소방위, “각종 보훈행사 참석하며 여러 가지 역할을 하게 돼”
공병삼 소방위(왼쪽 첫 번째)가 직원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경기뉴스광장 김지호
경기도 부천소방서 중앙119안전센터 공병삼 소방위는 지난 2004년 소방 공직에 입문했습니다. 현재 공 소방위는 소방 특수차량 담당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는 지난 6월 부천소방서 소속 공병삼 소방위 가족이 국가보훈부(구 국가보훈처)로부터 ‘명예로운 보훈가족’에 선정됐다고 밝혔습니다.
공병삼 소방위 가족은 증조부가 독립유공자, 조부는 6.25전쟁 참전 전상 국가유공자, 부친은 월남전 참전 전상 국가유공자로 3대가 국가유공자 가문입니다.
증조부인 고(故) 공칠보(1995년 대통령 표창 추서) 애국지사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오산시장에서 조국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와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 1939년 10월 순국했습니다.
조부인 고(故) 공진택 씨는 6·25전쟁 참전 유공자로 백마고지 전투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고로 시력을 모두 잃었습니다.
부친인 고(故) 공남식 씨는 월남전 참전 전상 국가유공자로 생전 고엽제 후유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소방관이었던 아버지는 공 소방위에게 인생의 롤모델이자 소방관의 길을 걷도록 인도해 준 스승이었습니다.
국가보훈부의 ‘명예로운 보훈가족’으로 선정된 후, 달라진 점이 궁금했습니다.
공 소방위는 “국가보훈부에서 시행하는 ‘모두의 보훈’(기부 프로젝트) 제1호 기부자로 선정됐고, 국가보훈부 아너스클럽 위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모두의 보훈’은 예전에는 군인과 경찰에 한정되어 있던 것을 이제는 일반 국민을 포함해 일상 속의 보훈대상으로 예우를 해주는 것”이라면서 “대한민국의 영웅과 그 유족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실 수 있도록 후원하기 위한 전 국민 참여 ‘보훈기부 프로젝트’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공 소방위는 이어 “각종 보훈행사에 참석하며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저도 무엇인가 하게 된 것에 대해 보람을 느끼게 됐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국립대전현충원을 방문해 아버지와 동료 소방관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도 7년째 꾸준히 실천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공병삼 소방위가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 주며 소방 공직에 들어서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 경기뉴스광장 김지호
부천소방서에 대해 자랑할 만한 점을 물었습니다.
이에 공 소방위는 “제가 어렸을 때는 부천소방서가 부천시 원미동 부천북초등학교 옆에 있었는데, 저희 아버지가 1977년도 경기도 소방 공채 1기로 시작, 여기(부천소방서) 근무하셨다. 아버지가 계셨던 곳에서 대를 이어서 부천소방서에 근무하게 된 것은 굉장히 저로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부천소방서는 경기도에서 출동률이 가장 높은 부서이다. 부천소방서 직원들이 고생도 하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자랑스럽고 책임감이 생기고, 이런 곳에서 근무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소방관’을 꿈꾸다
공병삼 소방위가 자신이 담당하는 소방 특수차량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경기뉴스광장 김지호
선친들의 뜻을 받들어 공병삼 소방위는 20년째 지역사회에 헌신하고 이웃을 보호하는 소방 공직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공 소방위는 “1988년 12월 24일 아버지가 안양소방서에서 화재 진압을 하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게 소름이 돋는데,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라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통보를 전화로 받았다. 어머니가 작은누나랑 (아버지에게) 가셨다. 처음에 서울대학교 병원에 갔는데 자리가 없어서 수술을 받지 못 했다. 옆에 있는 경희대학교 병원에 가서 다행히 아버지가 수술을 받으셨다”라고 운을 뗐습니다.
공 소방위는 이어 “아버지가 수술 후 퇴원하시는 데까지 약 1년정도 걸렸다. 오래 입원을 했다. 뇌수술을 하니 어느 날 아버지가 굉장히 어린 아이로 변하셨다. 뇌수술 후, 재활이 어려웠다. 아버지에게 (면회를) 갔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 불 끌 때 죽는 게 두렵지 않나요?’라고 물어봤다”라면서 “아버지가 웃으시며 ‘소방관이 죽는 걸 두려워하면 불을 끌 수 없다’라고 하셨다. 그 말이 저에게는 어린 마음에 멋있게 들렸다”라고 소방 공직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소개했습니다.
특히 “저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눈물이 많아졌다. 이런 인터뷰를 하면 (아버지 생각에) 계속 눈물이 난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지금 굉장히 참으면서 이야기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굉장히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제가 소방공무원의 길을 준비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공병삼 소방위는 헌혈 활동을 통해 백혈병 어린이를 돕는 등 따뜻한 나눔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 경기뉴스광장 김지호
공 소방위는 헌혈 활동을 통해 백혈병 어린이를 돕는 등 따뜻한 나눔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헌혈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으니, 공 소방위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헌혈 버스가 와서 (헌혈을) 시작했다. (헌혈하고 받는) 빵을 먹으러 호기심에 시작했고, 그다음에 2004년 소방(공직)에 임용하면서 ‘보람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시작한 게 헌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어 공 소방위는 “헌혈이 두 달에 한 번 하는 줄 알았는데, 성분 헌혈은 2주에 한 번 가능하다고 하여 30번하고 200번까지 했다”라며 “지금은 헌혈을 위해 식사 조절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지금은 2주에 한 번 헌혈을 안 하면 허전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공 소방위는 경기소방에서 ‘헌혈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2007년 30회 헌혈 유공장 ‘은장’에, 2008년 50회를 실천해 ‘금장’을 대한적십자로부터 받았습니다.
또한, 공 소방위는 지난 2020년 6월 헌혈 100회를 달성해 헌혈 유공장 ‘명예장’에 등극했고 최근 헌혈 200회를 기록했습니다.
꾸준한 기부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공 소방위는 지난해 7월 헌혈증 119장을 병마와 힘겹게 싸우는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며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에 기부했고, 하루 119원을 평생 기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또 광복회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본인, 아들 등 3대 이름으로 10년째, 대한적십자사에 8년째 기부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공 소방위는 “119라는 숫자가 사람을 살리는 숫자이다. 제가 소방관이니 작년에 119장의 헌혈증을 모아서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에 기부했다. 경기도 ‘아름다운 동행’ 기부가 월 3천 원 정도 하는데, 매일매일 아이를 살린다는 마음에 119 숫자와 연관지어 하루에 119원으로 기부를 시작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공 소방위는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아버지와 제가 매월 1만 원씩 광복회에 기부했다. 광복회보에 보면 맨 뒤에 매월 기부자 이름이 나온다”라면서 “아버지 이름이 사라지는 게 싫어서 아버지 이름으로 1만 원, 제 이름으로 1만 원, 아들 이름으로 1만원 해서 총 3만 원을 기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한 후, “대한적십자 기부는 자동이체로 최초 1만 원 했는데 늘리다 보니 2만5천 원이 됐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이번에 ‘명예로운 보훈가족’에 선정되고 기부프로젝트가 생겨나니 국가보훈처에 1만 원 기부하는 등 그런 식으로 하다보니 늘어나게 된 것”이라면서 “한곳에 10만 원 하면 못하는 데 조금조금씩 의미를 두고 기부를 하고 있고, 종신 기부를 한다. 기한을 두면 내가 소홀해질 것 같아 평생 기부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제가 은퇴하고 연금으로 생활할 때도 무리가 안 되는 금액이라 생각된다”라고 전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공 소방위는 “앞으로의 계획은 그냥 열심히 생활하는 것이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다. 열심히 과하지 않게, 욕심 안 부리면 되겠죠”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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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소방, ‘그저 빛’] ① 나에게 소방은 ‘감사함’입니다!
[경기소방, ‘그저 빛’] ② 나에게 소방은 ‘소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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