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의 중심 기회의 경기. ⓒ 경기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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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6월, 교과서 속에 박제된 안보 관광지를 넘어, 묵묵히 숨겨진 영웅들의 길을 걸어봅니다.
비극의 격전지에서 평화로운 숲길과 문화유산으로 피어난 공간들. 역사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여정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천혜의 자연이 있는 지역 양평은 과거 전쟁의 아픔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바로 지평의병과 지평리전투다. 자료사진. ⓒ 경기뉴스광장 김지호
천혜의 자연이 있는 지역 양평. 이제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자연 명소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곳은 전쟁의 아픔을 지닌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곳 ‘지평리’에서 벌어진 사건들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1895년 10월,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같은 해 11월 단발령까지 벌어지자 이를 참지 못한 지평 출신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끄는 포수 400여 명이 국가의 위기를 인식하고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의했습니다.
인근 강원지방과 충북지방의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된 대표적인 척사의병이자 최초의 을미의병이라 일컬어지는 ‘지평의병’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며 중공군의 개입으로 피해가 막심해지는 가운데, 미 제2사단 제23연대(프랑스대대 배속)가 1951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지평면 일대에서 중공군 3개 사단 규모의 집중공격을 막아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유엔군이 중공군과 싸워 얻은 최초의 전술적, 작전적 승리였던 전투, ‘지평리 전투’입니다. 지평리전투 이후 유엔군은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후 38도선을 회복하는 반격의 중요한 기점이 됐습니다.
격전의 지평리, 전략적 요충지로 승리를 이끌다

평범한 시골 마을 지평리가 격전의 장소가 된 까닭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자료사진. ⓒ 경기뉴스광장 김지호
평범한 시골 마을 지평리가 격전의 장소가 된 까닭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군 입장에서는 지평리가 함락될 경우 중공군과 인민군이 여주 방면으로 진격 후 주력부대를 남하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었는데요.
당시 횡성과 평창을 함락한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지평리를 돌파하기로 했고 연합군 23연대는 일찌감치 지평리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병력 규모가 컸기 때문에 지평리 사수 작전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지를 빼앗기고 또 빼앗는 전투가 3일간 치열하게 이어졌고 마침내 미군 특수임무 부대가 지평리에 도착하면서 적군은 퇴각했습니다.
당시 지평리를 포위했던 중공군 3개 사단을 1개 연대가 막아낼 수 있었던 요인은 미군과 프랑스군의 치열한 저항과 전술, 후방의 화력 지원 등으로 풀이됩니다.
또한 연합군 23연대의 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전투 중 종아리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부대의 지휘권을 넘기지 않고 끝까지 싸웠으며 프랑스 외인 대대를 지휘했던 몽끌레아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영웅으로 불렸을 만큼 이름난 군인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참전한 지평리 전투였지만 한국군이 전무하진 않았습니다. 카투사 80명과 일반병 100명 등 180명의 한국군이 프랑스 대대에 섞여 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지평리의 기억, 현재에서 다시 만나다
▢ 지평리 전적비

양평에는 지평리 전투 그 역사적 사건을 기리기 위한 장소가 있다. 바로 ‘지평리 전적비’다. ⓒ 한국관광콘텐츠랩 출처
지평리 전투 그 역사적 사건을 기리기 위한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지평리 전적비’인데요.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외부에 위치한 이 비석들은 지평리 전투를 기리는 비석입니다. 화강암 계단 위에 편평하게 조성한 대지 위에는 총 세 개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쪽 두 개 중 왼쪽은 프랑스군을 향한 ‘지평리전투UN(프랑스) 군참전충혼비’, 오른쪽은 미국군을 향한 ‘지평리전투UN(미국) 군전승충혼비’입니다.

3개의 비석 중 가운데 안쪽에 세워진 비석은 ‘지평리지구전투전적비’로 국군의 공적을 기념하고 전사한 장병의 영령을 추모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한국관광콘텐츠랩 출처
그리고 가운데 안쪽에 세워진 비석이 ‘지평리지구전투전적비’입니다. 1957년 7월 국군 제5사단이 건립했으며 중공군 방어전투의 공적을 기념하고 전사한 장병의 영령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오늘의 자유와 평화를 있게 한 지평의병 정신과 지평리전투의 희생을 기억하는 장소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지평의병 그리고 지평리전투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지도와 영상, 역사적 유물 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 지평리 전적비 안내
○ 주소: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로 357
○ 이용요금: 무료
▢ 지평양조장

지평막걸리를 생산하던 지평양조장은 6·25 전쟁 당시 사령부로 쓰이기도 했다. ⓒ 한국유산포털 출처
6·25 전쟁의 여파는 전쟁터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중 한곳이 90년 동안 3대에 걸쳐 지평주조에서 생산해 낸 지평막걸리의 생산지 ‘지평양조장’인데요.
사실 우리에게 지평막걸리는 굉장히 유명한 술이죠. 여기서 ‘지평’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의 지명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지평막걸리의 생산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양평군 지평면 지평의병로62번길 27에 세운 막걸리 양조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지평양조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으로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던 양평에서 유일하게 잔존한 건물이라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지평리 전투가 벌어진 1951년에는 중공군에 맞서던 유엔군의 지휘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양조장 입구 놓여있는 기념비. ⓒ 한국유산포털 출처
양조장 입구에는 당시 사령부였음을 알려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기념비에는 “1951년 3월 한국전 참전 유엔군 프랑스 육군의 전설적인 사령관, 몽클라르 장군께서 지평리 전투를 지휘하시는 동안 이곳을 사령부로 삼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이후 지평양조장은 지평막걸리를 만드는 지평주조가 판매량이 늘어 따로 막걸리 제조 공장을 세우면서 이곳에서는 더 이상 막걸리를 만들지 않게 됐습니다. 양평군은 2018년부터 이곳을 건축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지평양조장 안엔 몽클라르 장군의 집무실도 남아있습니다.

지평양조장이 주목받는 점 중 하나는 바로 구조적인 측면으로 한일식 목구조에 탁주 생산 공장으로써 기능적 특성까지도 잘 갖추고 있다. ⓒ 한국유산포털 출처
지평양조장이 주목받는 점으로 구조적인 측면도 있는데요. 일제 강점기 한식 목구조를 바탕으로 일식 목구조를 접합하여 대공간을 구성한 절충식 구조로 되어 있고 당시 탁주 생산 공장으로서 기능적 특성을 건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조선 전통의 목구조 위에 일식 목구조를 접합하여 기본 공간을 구성하였으며 흙벽돌로 외벽을 쌓았습니다. 환기를 위하여 건물의 상단에 높은 창을 두었고 보온을 위하여 벽체와 천장에 왕겨를 채워 넣었고 서까래 위에는 흙을 받쳐 기와를 이기 위하여 고안한 나무 산자 대신 대자리를 짜서 대체했습니다. 해당 건물은 427.7㎡ 규모로 2014년 7월 1일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다시금 술을 빚기 시작한 지평양조장은 100년 된 옛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로, 전통방식을 이어가려 애쓰며 막걸리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지평양조장의 지평막걸리는 전국적으로 애주가들이 찾는 막걸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또한. 술밥을 배양하는 ‘보쌈실’에서 직접 손으로 섞어 손맛을 내는 전통방식을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룩을 배양하는 상자도 오동나무를 쓰고, 쌀막걸리의 경우 100% 국내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지난 2020년 6월, 지평주조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막걸리 100만 병에 6·25전쟁 70주년 엠블럼을 부착해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 지평양조장 안내
○ 주소: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의병로62번길 27 지평양조장
○ 이용시간: 10:00~17:00 (입장마감 16:30 / 매주 월요일 정기휴무)
○ 이용요금: 무료
○ 누리집: https://www.jpjujo.com/
○ 문의: 080-700-7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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